•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1. 국호에 숨겨진 우리 역사
  • 왕의 출현과 왕국의 등장
신명호

우리나라 역사는 왕이 등장한 이후 오랜 세월 왕국시대가 지속되었다. 삼국시대 이후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도 왕국시대였다. 고려시대는 비록 대내적으로는 제국(帝國)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엄연히 왕국(王國)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대외적으로도 또 대내적으로도 왕국이었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역사상에 등장하였던 국호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후삼국시대의 후백제, 후고구려 그리고 훗날의 고려와 조선, 대한제국은 모두가 역사상에 등장하였던 국호를 다시 채용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국호는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고, 중국 황제에게 의뢰하여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앞서 살펴본 신라의 경우가 스스로 결정한 사례였다. 고구려, 백제도 스스로 결정한 국호였다. 고려의 경우는 태조 왕건(王建)이 국호를 결정하여 선포하였다.

6월 병진일에 태조 왕건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개원(改元)하여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3)『고려사(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1년(918)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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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상
고려 태조 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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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라는 국호는 물론 삼국시대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생각에서 사용하였다. 국호를 자체적으로 선포한 고려는 그만큼 자주적인 나라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고려의 통치자는 대내적으로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고려의 통치자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고려 국왕’에 책봉(冊封)되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고려는 ‘고려 왕국’이었다. 이 고려 왕국은 500년간 지속되다가 조선의 건국 세력들에게 멸망당하였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중국 황제에게 의뢰하여 결정된 국호였다. 고려의 국호가 자체적으로 결정되었던 사실과 비교하면 조선은 그만큼 비자주적인 나라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조선의 건국 세력들이 비자주적이어서 중국 황제에게 의뢰하여 국호를 결정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우선 고려의 태조 왕건이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전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지만, 그 내용과 과정에서 차이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태조 왕건에 의해 축출된 궁예(弓裔)는 왕건에게 합세한 군사력에 의해 쫓겨났지만, 태조 이성계에게 밀려난 공양왕(恭讓王)은 군사력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대비(大妃)에게 폐위(廢位)되었다는 사실이다. 군사력으로 궁예를 몰아낸 태조 왕건은 즉위 및 국호 결정을 주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태조 이성계는 군사력으로 공양왕을 축출한 것이 아니라 대비의 권위를 이용해 공양왕을 축출하였으므로 즉위 및 국호 결정을 주체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한 대비에 의해 ‘감록국사(監錄國事)’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왕위에 올랐다. ‘감록국사’란 정식 왕이라기보다는 임시로 국사를 감독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태조 이성계를 임명한 사람도 엄연히 대비였다는 사실에서 형식적으로 이성계는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공양왕의 선위(禪位)와 대비의 권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것이 되었다. 이것은 물론 태조 이성계의 왕위 찬탈을 호도하려는 책략이었지만, 바로 그 책략 때문에 태조 이성계는 즉위와 국호 결정을 주체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계속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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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어진
태조 이성계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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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서도 스스로 새 나라의 왕이 아니라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로 행세하였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자신을 ‘권지고려국사’라고 하였다. 이런 논리라면 태조 이성계는 계속하여 고려의 왕이라는 말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태조 이성계나 조선 건국 주체 세력의 바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명나라에서 새로운 나라의 국호 문제를 먼저 제기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고려의 왕위를 찬탈(簒奪)하였다는 것이나 같은 의미였으므로, 형식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국왕 즉위는 공양왕의 선위와 대비의 권고에 의한 것으로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조 이성계와 조선 건국 주체 세력은 국호 결정도 명나라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함으로써 찬탈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명나라에서 국호 문제를 먼저 제기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갔다.

명나라는 태조 이성계의 즉위 사실을 알리는 외교 문서에 의해서 고려 왕조가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외교 문서에 태조 이성계가 ‘권지고려국사’로 표현되어 있었으므로, 고려를 멸망시킨 신왕조가 새로운 국호를 채용하였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명나라는 신왕조의 국호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였다. 태조 이성계와 조선 건국 주체 세력의 기대대로 명나라는 국호 문제를 먼저 제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의 통치자는 명령을 자유로이 할 것이다. 고려의 통치자가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또 변방에서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사신이 양국 간에 왕래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그 나라의 복일 것이다. 이 외교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고려에서는 국호를 무엇으로 고칠 것인지를 빨리 달려 와서 보고할 것이다.4)『태조실록』 권2, 태조 1년(1392) 11월 갑진.

명나라의 외교 문서를 접수한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에게 국호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 결과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이라는 두 가지가 추천되었다. 조선은 ‘고조선’을 염두에 둔 국호였고 화령은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인 화령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이 두 가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 그 중에서 골라 줄 것을 요청하였다. 1393년(태조 2) 2월 15일 명나라에서 국호를 결정한 외교 문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5)『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 2월 경인.

조선과 화령 중에서 조선을 신왕조의 국호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고려를 멸망시킨 신왕조의 공식 국호는 조선이 되었다. 조선의 통치자는 중국 황제에게 ‘조선 국왕’으로 임명되었으므로 조선도 왕국이었다.

이처럼 겉으로 보면 조선의 국호는 명나라 황제가 결정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조선의 국호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조선과 화령 두 가지를 골라 명나라에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국호까지 명나라 황제에게 의뢰하였던 조선은 고려에 비해 그만큼 비자주적이었던 국가였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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