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1. 국호에 숨겨진 우리 역사
  • 민주 국가의 출현과 국호, 대한민국
신명호

대한제국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면서 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국가의 멸망이며 동시에 국호의 멸망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탄(倂呑)하면서 대한제국 대신에 다시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조선은 독립국 조선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조선이었다. 조선은 조선 총독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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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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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우리 민족은 곧바로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전개하였다. 광복 운동은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국가 재건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상하이(上海) 임시 정부의 탄생을 가져왔다. 상하이 임시 정부는 수립 직후 국호를 결정하고 임시 정부 조직과 임시 헌장(臨時憲章)을 제정하였다. 임시 정부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다.

(1919년) 4월 11일에 국호, 관제, 국무원(國務員)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자는 현순(玄楯)의 동의(動議)와 조소앙(趙素昻)의 재청(再請)이 가결되어 토의에 들 어갔다. 먼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칭하자는 신석우(申錫雨)의 동의와 이영근(李渶根)의 재청이 가결되었다.9)『임시 의정원 회의록(臨時議政院會議錄)』, 제1회집(第一回集). 국사 편찬 위원회, 1965.

임시 정부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이전의 국호였던 ‘대한제국’에서 ‘제국’만 ‘민국’으로 바뀐 것이었다. 굳이 글자 수로 따지면 ‘제’ 자 하나가 ‘민’ 자로 바뀐 것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국호 자체만 보면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대한’을 그대로 임시 정부의 국호로 계승하되, ‘제국’을 ‘민국’으로 변경시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왕이 등장한 이래 국가의 주권자로 행세해 온 왕이나 황제를 대신하여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로 등장하였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예컨대 대한제국의 주권자는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에 규정된 대로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는 황제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권자는 임시 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民主共和制)로 함’이라고 천명한 그대로 황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의 역사성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수천 년 지속되어 온 군주제를 민주제로 전환시켰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의 멸망은 우리 민족에게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라는 암울한 역사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군주제의 종말과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측면도 갖고 있었다. 특히 3·1 운동 이후 전 민족의 독립 염원 속에서 탄생한 상하이 임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 공화제를 천명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민주주주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국호와 헌법의 골격에서 상하이 임시 정부를 계승하였다. 광복 이후 3년 동안의 미군정기(美軍政期)를 거친 후 우리나라의 골격을 짠 것은 제헌 의회(制憲議會)였다. 제헌 의회는 말 그대로 헌법을 제 정하는 국회라는 의미였다. 국호는 물론 권력 구조도 제헌 의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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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국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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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 의회에서는 국호를 결정하고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실무 위원으로 헌법 기초 위원회(憲法基礎委員會)를 조직하였다. 헌법 기초 위원회는 이청천(李靑天), 조봉암(曺奉巖), 서상일(徐相日) 등 30명의 제헌 의회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헌법 기초 위원회를 지원하기 위해 유진오(兪鎭午) 등 전문가 10명이 전문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헌법 기초 위원회에서 거론된 국호는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한국 등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이승만(李承晩) 의장과 이청천 계열에서 지지하였는데,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비해 한국 민주당(韓國民主黨) 계열에서는 고려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선호하였다.

1948년 6월 7일 헌법 기초 위원회는 국호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각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국 표결(票決)에 들어갔다. 결과는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마침내 30명의 위원 중에 과반수가 넘는 17명의 찬성을 얻은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되었다.

헌법 기초 위원회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하자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서울신문』에서는 6월 24일 국호 문제를 가지고 여론 조사(輿論調査)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의 경우, 검찰청의 엄상섭은 ‘새한’을, 대한 청년단의 이선근은 ‘대한민국’을, 실업가 김익균은 ‘조선공화국’을 찬성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호는 광복 후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열망 속에서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식에서 채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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