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2. 국왕 칭호로 보는 우리 역사
  • 최초의 지배자 이름, 단군왕검과 혁거세
신명호

국왕(國王)은 ‘국(國)의 왕(王)’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서인가 국(國)에 왕(王)이 등장하면서 ‘국왕’이라는 말이 쓰였던 것이다. 물론 왕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국에는 통치자가 있었다. 그러면 왕이 등장하기 이전에 국의 통치자는 무엇이라고 하였을까?

현재 남아 있는 공식 기록으로 볼 때 중국에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왕은 고조선의 준왕(準王)이었다. 준왕이 왕을 칭하게 된 것과 관련하여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명칭을 참람(僭濫)되이 써서 ‘왕(王)’이라고 칭하였다가, 연(燕)나라의 망명인 위만(衛滿)에게 공격당하여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에 이르기를,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되어 동쪽으로 땅을 노략질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또한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였다. ……”고 하였다.10)『삼국지(三國志)』 권30,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

고조선의 준왕은 연나라 사람들이 왕을 칭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왕이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왕(王)’이라는 칭호는 한문이므로, 이런 표현은 우리 조상들이 한문을 수용하고 또 준왕이 왕을 칭하는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중국에서 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인식한 이후에나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역사 단계가 왕을 칭할 정도로 진전되었을 때 그런 칭호를 쓸 수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왕을 칭하기 이전 독자적으로 불리던 고조선의 통치자 호칭이 있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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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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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는 왕을 칭하기 이전의 준을 ‘후(侯)’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자 이후 고조선의 통치자가 대대로 중국의 ‘후’ 작위(爵位)에 봉작(封爵)되었다는 의미이다. ‘후’는 고대 중국에서 시행된 5등 작위제(五等爵位制), 즉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중의 하나였다. 중국의 작위제는 황제가 수여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받은 사람은 제후가 될 수 있었고 후손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이른바 기자 이후의 고조선을 ‘기자 조선(箕子朝鮮)’이라고 하는데, 중국 측 기록에서는 ‘기자 조선’을 기자가 중국 황제에게 ‘후’ 작위를 받아 고조선의 제후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후’ 작위를 상속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자 조선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그 통치자를 ‘후’로 단정하기도 곤란하다. 게다가 ‘후’라는 말도 한문이므로, ‘후’라는 용어를 한문 수용 이전 고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통치자 칭호라고 할 수도 없다.

‘왕’을 칭하기 이전 고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통치자 호칭은 ‘단군 조선’의 ‘단군’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군’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단군’의 의미를 놓고 그야말로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 할 정도로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단군’의 정확한 표기가 단군(檀君)인지 아니면 단군(壇君)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나무 목(木)이 들어가는 단군(檀君)은 ‘박달나무’와 관련되어 해석될 수 있고, 흙 토(土)가 들어가는 단군(壇君)은 ‘제단(祭壇)’과 관련되어 해석될 수도 있으므로 같은 ‘단군’이라는 말을 가지고도 합의된 의미를 도출하기가 아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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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단군이 ‘제사장(祭司長)’과 ‘정치 지도자’의 뜻을 갖는다는 사실, 즉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통치자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는 대체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의견 통일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통치자는 정치 지도자로서보다는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예컨대 신라의 역사에서 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통치자 호칭이었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은 종교 지도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거서간이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신라 시조의 성은 박 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일에(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는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那伐)이라 하였다. …… 고허촌(高墟村)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11)『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박혁거세(朴赫居世).

박혁거세는 신비하게 탄생하였으므로 서라벌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으며, 그를 부르는 호칭으로 쓴 거서간은 ‘존귀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존귀한 사람은 정치권력(政治權力)을 소유해서 존귀한 것이 아니라 혁거세의 경우처럼 ‘신비한 탄생’ 같은 초월적·종교적 측면을 갖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거서간 다음에 신라 통치자의 호칭으로 등장하는 ‘차차웅’에 대한 다음의 설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은 혹 자충(慈充)이라고도 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12)『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차차웅은 곧 무당이라는 의미였다. 신라 사람들이 차차웅을 통치자로 모시는 이유는 차차웅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든’다는 것은 곧 차차웅이 ‘제사장’이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것은 국가가 처음 출현하던 시기의 통치자는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겸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은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이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거서간, 차차웅 이외에도 신라에서 통치자를 호칭하는 용어로 또 이사금(尼師今)과 마립간(麻立干)이 있었다. 이 중에서 이사금의 유래와 의미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유리는 남해차차웅의 태자이고 어머니는 운제 부인(雲帝夫人)이며 왕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왕비의 성은 박 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하였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 보십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이라 불렀다.13)『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이사금이라는 용어는 직접적으로는 잇금, 즉 치아(齒牙)의 수를 지칭하며 그것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의미만을 가지고 본다면 차차웅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면 이사금은 ‘성스럽고 지혜로운’ 세속적 통치자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립간이라는 호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서는 눌지마립간을 신라 최초의 마립간으로 기록하였는데, 김대문은 마립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곧 시조(試操, 말뚝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왕의 말뚝은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마립간을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하였다.14)『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이 설명만 가지고 마립간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마립간이 신하들보다 상위의 위계를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근본으로 하는 세속적 통치자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신라 역사에 등장하였던 통치자의 호칭들, 즉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은 신라의 역사가 진전됨에 따라 통치자의 성격이 최초 제사장에서 점차 세속적 권력자로 변화해 가던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하겠다. 이런 추세는 마침내 503년(지증왕 4)에 신라 통치자의 호칭이 국왕으로 바뀌면서 고대 왕국이 출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 백제에는 신라보다 이른 시기에 왕이 출현하였다. 이렇게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에서 왕이 출현한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민주제 국가가 건국될 때까지 우리나라 역사에는 ‘왕’을 최고 권력자로 하는 군주제 국가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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