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2. 국왕 칭호로 보는 우리 역사
  • 왕국의 지배자, 왕
신명호

고대 왕국의 지배자 왕이란 무슨 뜻일까? 왜 왕(王) 자가 고대 왕국의 지배자를 뜻하는 글자로 사용되었을까? 그 같은 의문을 해결하려면 왕이라고 하는 글자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왕은 중국의 한문 문자로서 본래 도끼의 상형 문자(象形文字)라고 한다. 도끼 자체는 왕이라고 하는 권력자가 출현하기 이전인 선사시대에 발 명된 도구였다. 석기시대에 돌도끼가 발명된 이래로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도끼는 유용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그 도끼가 왕의 상형 문자가 된 이유는 그 기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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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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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는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가르기 위한 도구(道具)이다. 예컨대 나무를 베어 넘기거나 장작을 팰 때 도끼를 이용한다. 아울러 도끼는 무기(武器)이기도 하였다. 전투 중에 적을 살상하거나 또는 형장(刑場)에서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거나 머리를 부수는 데도 도끼를 썼다.

이렇게 나무를 패거나 사람을 살상하는 데 쓰이는 도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료에 따라 돌이나 금속으로 달라지기는 하지만 도끼 자체의 부분과 도낏자루의 부분이 그것이다. 도끼 자체의 부분은 다시 대상물을 패거나 자르는 도끼의 날과 그 반대쪽의 도끼머리 그리고 중간에 도낏자루를 끼우는 구멍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부분의 모습을 본떠 만든 한자가 바로 ‘왕(王)’이라는 글자이다.

선사시대에 도끼가 발명되면서 도끼를 소유한 사람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끼 자체가 권력자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예컨대 신석기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돌도끼는 그것을 소유하였던 사람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도끼를 사용하여 나무를 베어 넘기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주로 남성이었다. 즉 도끼는 선사시대 이래로 남성 노동 내지 전쟁 활동을 상징하였다. 청동기시대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도끼를 든 남성 권력자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자, 도끼는 그 시대의 권력자를 상징하게 되었다. 예컨대 국가의 통치자인 왕을 비롯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사(士), 가족의 장(長)인 부(父) 등이 모두 도끼의 상형 문자인데, 이것은 그 시대에 도끼를 든 남성들이 국가와 가족의 권력자로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도끼는 권력자의 등장 및 권력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로서 왕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15)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 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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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거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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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에서 왕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최고의 권력자를 나타내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진시황(秦始皇) 이후 ‘황제’가 최고의 권력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되면서 ‘왕’은 황제 아래의 제후 왕(諸侯王)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국은 주변국과의 국제 관계에서도 황제와 제후 왕의 관계를 적용하여 형식적으로 주변국의 통치자들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런 국제 질서를 중국적 세계 질서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왕들은 절대 권력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우리나라는 중국적 세계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왕들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玉璽)도 중국 황제로부터 받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왕은 ‘절대 권력자로서의 왕’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 왕’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그 같은 전형을 조선의 왕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태조 이성계는 처음 고려 공양왕의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칭호도 ‘조선 국왕’이 아니라 ‘권지고려국사’였다. 조선 국왕이라는 칭호는 신왕조의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라는 칭호를 중국과의 대외 관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려면 중국 황제가 인정한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이 필요하였다. 고명이란 중국 황제가 태조 이성계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임명장이고, 인장은 조선 국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 즉 옥새였다. 이 고명과 인장을 받아야만 명실 공히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 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신왕조의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후 고려 국왕이라 새겨진 인장을 명나라에 반환하였다. 고려가 멸망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려 국왕의 인장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국왕의 인장을 반환하였지만 아직 조선 국왕이라 새겨진 인장을 받지는 못한 상태였다. 당연히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조선 국왕이라 새겨진 인장을 찍을 수 없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 2월 15일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과 인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외교 문서가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크나큰 외교 분란을 가져오고 말았다.

고명과 인장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는 당시의 실력자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 홍무제(洪武帝)는 이 문서 중에 쓰인 몇몇 표현을 무례하다고 하면서 고명과 인장을 거절하였다. 그뿐 아니라 외교 문서를 쓴 당사자를 명나라로 보내라고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정도전을 보내라는 것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을 보내지 않고 도리어 요동 정벌(遼東征伐)을 추진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운(戰雲)이 감돌기까지 하였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명과 인장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살해되고 정종이 즉위하였다. 명나라에서도 홍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였다. 상황이 변하자 정종은 건문제에게 고명과 인장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고, 건문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여 태종이 즉위하자 건문제는 이미 허락하였던 고명과 인장을 취소하였다. 결국에는 태종이 다시 고명과 인장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는데, 그 고명과 인장이 1401년(태종 1) 6월 12일에 도착하였다. 이때 받은 인장은 사각(四角)의 형태로 되어 있었으며, 전문(篆文)으로 ‘조선국왕금인(朝鮮國王金印)’이라는 여섯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금인이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옥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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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지인의 도설과 인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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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지인의 도설과 인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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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명나라에서 영락제(永樂帝)가 건문제를 축출하고 황제에 즉위하는 정변(政變)이 발생하였다. 태종은 곧바로 하륜(河崙)을 보내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였는데, 하륜은 영락제에게 또다시 고명과 인장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락제가 다시 고명과 인장을 보냈는데, 이것을 태종이 받은 때는 1403년(태종 3) 4월 8일이었다. 그때 받은 인장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여섯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전에 건문제가 보냈던 고명과 인장은 명나라로 반환하였다. 따라서 조선 전기 왕권을 상징하던 옥새는 이때에 받은 금인으로서, 국왕의 도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장이 바로 이 금인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에게는 수많은 도장이 있었다. 공적으로 사용하는 도장은 물론 사적으로 쓰는 도장도 있었다. 이 중에서 공적인 국왕의 도장을 보(寶)라고 하였다. 예컨대 교서(敎書)나 교명(敎命)에 사용하는 도장은 시명지 보(施命之寶)라고 하였고,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는 도장은 이덕보(以德寶)라 하였으며, 과거 시험에 사용하는 도장은 과거지보(科擧之寶)라 하였고, 유서(諭書)에 사용하는 도장은 유서지보(諭書之寶)라고 하는 식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받은 금인은 대보(大寶) 또는 옥새(玉璽)라고도 하였는데, 그만큼 중요한 도장이라는 뜻이었다. 이 금인은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후계 왕이 즉위할 때 즉위식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왕은 ‘절대 권력자 왕’을 의미하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후 왕’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조선국왕지인’이라 새겨진 옥새였던 것이다.

왕국의 최고 통치자를 지칭하던 왕이라는 호칭은 대한제국이 등장하면서 ‘황제’로 바뀌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최고 통치자의 호칭이 왕이 아니라 황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형식상 중국의 황제에게 책봉되던 조선 왕국에서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권 독립 국가 대한제국이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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