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2. 국왕 칭호로 보는 우리 역사
  • 황제국의 지배자, 황제
신명호

1897년(광무 1)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내외적으로 공인받는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 황제국의 주권자는 ‘황제’였으므로 ‘왕’이라고 하는 용어는 더 이상 최고 권력자를 지칭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왕 또는 친왕(親王)은 봉작명(封爵名)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은(李垠)을 영왕(英王) 또는 영친왕(英親王)이라 한 것처럼 황제의 아들 또는 황제의 형제들에게 수여되는 작위의 명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고종 황제는 왕으로 있다가 곧바로 황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대군주(大君主)’라고 하는 중간 단계를 거쳐 황제가 되었 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 권력자를 지칭하는 용어는 왕에서 대군주로, 대군주에서 황제로 변하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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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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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왕에서 대군주로 된 것은 일제의 영향력 아래에서였다. 일제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 농민 봉기(東學農民蜂起)를 기화로 군대를 파견하고 경복궁을 점령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조선의 독립이라는 미명하에 청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이 황제국을 선언한다는 것은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분명 청나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의미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일제에의 예속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고종에게 황제에 즉위할 것은 물론, 연호의 사용과 단발(斷髮)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때 오토리 게이스케의 요구대로 하였다면 고종은 벌써 황제에 즉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제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고 있던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타협안으로 황제 대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라는 말만 안 썼을 뿐이지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도 썼고, 대군주의 존칭으로 ‘폐하(陛下)’라는 말도 썼으며 단발령까지 시행함으로써 대부분 일제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런 면에서 ‘대군주’라는 칭호에는 일제에 대한 고종의 저항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일제의 주권 간섭이 노골화되자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주권 독립을 되찾으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명성 황후 시해라고 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다. 고종은 일제의 폭압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관파천이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기간 중에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열망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백성들은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한편 황제로 즉위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종이 황제에 즉위한다면 그것은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원래 황제라고 하는 용어는 중국의 진시황제가 처음 사용하였다. 진시황제의 ‘시황제(始皇帝)’란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였다. 진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전에는 왕이라고 불렸다. 왕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진나라를 포함하여 전국시대의 이른바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하는 일곱 나라의 지배자는 모두 왕이었다.

전국 칠웅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왕이라는 용어로는 자신의 공업(功業)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은 자신에게 정복된 지배자들이었으므로, 그런 왕을 정복한 자신은 왕과 구별되는 특별한 칭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제는 신하들에게 왕보다 더 존귀한 호칭, 즉 존호(尊號)를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때 신하들은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합니다.”고 하면서 ‘왕’을 ‘태황’으로 바꾸자고 건의하였다. ‘태황’은 달리 ‘인황(人皇)’이라고도 하였다. 태황이나 인황은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였다. 이 건의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면 진시황은 ‘진시황제’가 아니라 ‘진시태황’ 또는 ‘진시인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시황은 태황 또는 인황이라는 칭호가 불만스러웠는지 ‘태황’ 대신에 ‘황제’로 바꾸게 하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태황’이라는 칭호에서 “태(泰) 자를 버리고,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제(帝)라는 호칭을 채용해서 황제라고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라고 하는 칭호가 탄생하였던 것이다.16)사마천(司馬遷), 『사기』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제6.

결국 중국에서 최초의 황제란 천황, 지황, 태황의 삼황(三皇)에 쓰인 ‘황(皇)’ 자와 오제(五帝)라고 할 때의 ‘제(帝)’ 자가 결합된 칭호였다. 삼황의 ‘황’이란 위대하다 또는 하늘의 신이라는 의미였으며, 오제의 ‘제’는 덕이 천지와 짝한다거나 하늘의 신이라는 의미였다. 결국 황제란 ‘공과 덕이 위대하여 천지에 짝하며 존귀하기가 하늘의 신과 같은 분’이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고종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황제 즉위는 거부하였지만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황제 즉위 요청은 거부하지 않았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자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1897년 5월 1일에는 전 승지 이최영(李最榮) 등이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며, 이어서 5월 9일에는 유학 권달섭(權達燮) 등이, 5월 16일에는 의관(議官) 임상준(任商準)이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이런 상소문에 대하여 고종은 “말이 옳지 못하다.”고 겉으로 거부하는 뜻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리 싫지 않다는 속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에 조정 중신들까지 황제 즉위를 요청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수백 명의 연명(連名) 상소문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10월 2일에는 조정 중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황제 즉위를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이날도 사양하였지만, 다음날도 백관들의 간청이 이어지자 마침내 “대동(大同)한 인정(人情)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어서 곰곰이 생각하다 이에 부득이 따르기로 하였다.”고 하여 황제 즉위를 허락하였다.17)『고종실록』 권36, 고종 34년(1897, 광무 1) 10월 3일.

고종은 길일(吉日)을 골라 황제 즉위를 10월 12일에 거행하도록 하였다. 그 사이 황제 즉위에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먼저 궁중 안에서 황제가 각국 사절(使節)을 접견(接見)하는 건물의 명칭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바꾸었다. 황제는 ‘공과 덕이 위대하여 천지에 짝하며 존귀하기가 하늘의 신과 같은 분’이므로 그런 황제가 임어(臨御)하는 건물의 명칭으로는 태극전이 제격이었다. 아울러 한양의 회현방 소공동에는 환구단을 마련하고 궁내부 (宮內府) 안에 환구단 사제서(圜丘壇祠祭署)도 설치하였다. 황제는 환구단에서 즉위하고 또 환구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내야하므로 환구단을 담당할 부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고종은 11일 오후 2시쯤에 경운궁을 떠나 환구단으로 행차하였다. 환구단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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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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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의 인화문에서 소공동의 환구단에 이르는 거리에는 병사들이 도열하여 고종의 행차를 호위하였다. 한양 시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와 등불을 높이 내걸고 고종의 황제 즉위를 환영하였다. 당시 고종의 행차를 『독립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1일 오후 2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 등물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하였다.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 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도를 찼다. 옛 풍속으로 조선 군복을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 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다.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18)『독립신문(獨立新聞)』 1897년 10월 14일자, 논설.

환구단에 도착한 고종은 교(轎)에서 내려 여(轝)로 갈아타고 동문을 통해 들어갔다. 고종은 준비된 제단, 제기, 희생물, 제사 용품 등을 조심조심 살펴보았다. 이어서 고종은 대신들을 불러 보고 국호를 대한으로 바꿀 것을 결정하였다.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국호도 새로 결정한 것이었다. 일을 마친 고종은 오후 4시쯤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새벽 2시쯤 고종은 다시 경운궁을 나와 환구단으로 행차하였다. 이번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환구단에 도착한 고종은 황천상제(皇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祇)의 신위(神位) 앞에서 제사를 올렸다. 황천상제와 황지기는 천지의 신명을 상징하였다. 천지의 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올려야 ‘공과 덕이 위대하여 천지에 짝하며 존귀하기가 하늘의 신과 같은 분’, 즉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황천상제와 황지기의 신위에 몸소 제사를 올린 후 고종은 황제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천지의 신명에 올리는 제사가 끝나자마자 의정(議政)은 백관을 거느리고 고종에게 황제의 어좌에 오를 것을 요청하였다.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망료위(望燎位)에서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대한 제사가 끝났으니 청컨대 황제의 옥좌에 오르소서.”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옆에서 부축하고 금의(金椅, 황금 옥좌)에 이르러 옥좌에 앉게 하였다. 백관들은 줄에 늘어섰다. 집사관(執事官)이 면복안(冕服案, 면류관과 십이장복을 올려놓을 책상)과 보안(寶案, 옥새를 올려놓을 책상)을 들고 왔다. 의정이 곤면(袞冕)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면복안 위에 올려놓았다. 의정 등이 곤면을 들어서 고종에게 씌워 드렸다. 의정이 제자리로 가자 찬의(贊儀)가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하라고 창(唱)하였다. 장례원(掌禮院)의 주사(主事)가 의정을 인도하여 고종 앞으로 갔다. 찬의가 무릎을 꿇고 홀을 꽂으라고 창하였다. 의정은 무릎을 꿇고 홀 을 꽂았다. 백관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봉보관(奉寶官)이 옥새 통을 열고 옥보(玉寶)를 꺼내 무릎을 꿇고 의정에게 주었다. 의정이 옥보를 받고 아뢰기를, “황제께서 대위(大位)에 오르셨으니 신 등은 삼가 어보(御寶)를 올립니다.” 하였다.19)『대례의궤』 조칙(詔勅), 정유(1897) 9월 17일.

이것이 고종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즉 천지신명에게 몸소 제사를 지낸 후에, 옥좌에 올라 곤면(袞冕)과 옥새를 받는 의식이 황제 즉위식이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 왕이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책봉을 받는 천자(天子)였던 것이다. 이렇게 고종은 황제에 즉위함으로써 중국 황제와도 대등하고 세계 모든 나라의 통치자와도 대등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선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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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즉위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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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즉위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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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궤』에 실린 대한국새(大韓國璽)
『대례의궤』에 실린 대한국새(大韓國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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