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3. 국왕에게도 보통 사람 같은 이름이
  • 조상과 나의 연결, 명
신명호

조선시대 왕의 적장자는 출생 후부터 원자라고 불렸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명이 있어서 아명으로도 불렸지만, 후기가 되면서 아명도 없어지고 단지 원자로만 불렸다. 그렇다면 원자는 명, 즉 이름을 언제 받았을까?

명은 세자로 책봉될 때 받았다. 세자 책봉 때에 명을 받는 이유는 세자 책봉과 함께 종묘와 사직에 세자를 책봉한 사실을 고하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때 세자의 이름을 고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원자의 이 름은 세자 책봉이 결정된 직후에 지었다. 원자의 이름이 결정되는 과정을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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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정명 단자
순종의 정명 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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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6년(영조 12) 1월 1일에 영조는 생후 1년이 되는 원자를 세자에 책봉하겠다고 하면서 승정원(承政院)에 원자의 이름을 전례(前例)에 의거해 결정하도록 명하였다. 같은 날 예조는 일관(日官)에게 세자의 이름을 정할 길일을 고르도록 하였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아울러 해당 길일에 대신과 의정부, 관각(館閣)의 당상관,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이 모여서 회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1월 4일에 대신과 의정부, 관각의 당상관, 육조의 참판 이상은 빈청(賓廳)에 모여서 세자의 이름을 의논하여 선(愃), 정(憕), 희()의 세 가지를 정하여 올렸다. 이 중에서 영조는 첫 번째 추천 이름인 선(愃)에 낙점(落點)을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세자의 이름은 선으로 결정되었다.

왕은 낙점한 정명 단자(定名單子)를 빈청에 내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자의 이름이 무엇으로 결정되었는지를 알게 하였다. 이어서 승지가 빈청으로 와서 이 정명 단자를 받아 갔으며, 예조 낭청(禮曹郎廳)이 승지로부터 정명 단자를 받아서 붉은 보자기로 싸고 붉은 함에 넣어 시강원 (侍講院)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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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계보기략』
『선원계보기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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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원자가 명을 갖게 되는 시기 및 방법은 양반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일반 백성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관례를 치르면서 명을 받았다. 아울러 대부분의 관명(冠名)은 항렬과 의미를 고려하여 집안 어른이 두 글자로 지었다. 글자는 현실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것을 사용해도 상관없었다.

이에 비해 원자는 성년에 이르지 않았을 지라도 세자에 책봉되면서 곧바로 명을 받았다. 그 이유는 세자가 된 후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 및 종묘나 사직에 세자 책봉을 고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있었다. 아울러 신하들이 추천한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명으로 골랐는데, 이는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이름을 신하와 왕의 합의하에 가장 좋은 이름을 고른다는 의미와 함께 장차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세자의 이름은 피휘(避諱)의 대상이 되므로 문자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글자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피휘란 일상생활에서 혐의하여 피한다는 의미인데, 왕의 이름은 일기, 편지, 작문 등에서 피휘해야만 하였다. 만약 실수로라도 왕의 이름을 쓰게 되면 불경죄(不敬罪)로 간주되어 곤장 80대의 벌을 받아야 하였다. 그러므로 왕의 이름은 일상생활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 특이한 글자를 쓰거나 아니면 새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이름이 두 글자가 아니라 한 글자인 이유도 피휘 때문이었다. 만약 왕의 이름에 두 글자를 쓴다면 피휘하 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었다.

만약 창업이나 반정을 통해 국왕이 되었을 경우, 그 왕의 이름이 흔히 쓰이는 글자라면 기왕의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의 경우, 성계(成桂)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글자였으므로 왕이 된 후에 단(旦)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왕의 이름은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피휘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왕 스스로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왕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종묘나 사직 등에서 제사를 지낼 때 축문에 이름을 쓰거나, 중국에 외교 문서를 보낼 때 이름을 쓰는 정도였다. 그 밖에는 이름을 쓰는 일이 없었다. 이름에는 부모형제가 그 사람에게 기원하는 희망이 들어 있으며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과 운명 자체가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문과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이름이므로 함부로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왕의 이름은 피휘의 대상이기도 하였고 그 자체로 휘(諱)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재에도 왕의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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