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4. 국왕을 국왕답게 하는 이름들
  • 하늘을 대신하는 왕의 호칭, 연호
신명호

왕 또는 황제는 이념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왕이나 황제는 자신들을 이 땅의 통치자로 만들어 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천문 관측소를 설치하고 밤낮으로 하늘을 살폈다. 그 결과 하늘의 운행 질서를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시간, 즉 역(曆)을 만들었다.

역은 현실적으로는 농업 사회에서 하늘의 절기(節氣)에 따르는 농사 월령(農事月令)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역을 만들고 이를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하늘의 운행 질서를 이 땅에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늘의 명을 받은 황제만이 갖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중국의 한나라 때부터 황제는 즉위 후에 자신만의 역을 선포하였는데, 그것을 연호(年號)라고 하였다. 연호란 말 그대로 ‘연도의 호칭’으로서 일 년 동안의 책력(冊曆)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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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비문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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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였으므로 황제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야 하였다. 연호는 황제마다 선포하였으므로 그 연호를 선포한 황제의 호칭으로도 이용되었다. 연호는 보통 두 글자를 사용하였다. 연호는 황제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포부 또는 이상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연호에 사용되는 글자는 각 황제의 개성이나 정치사상(政治思想)에 따라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나타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상징하는 연호가 많았지만 불교나 도교에서 나온 연호도 있었다. 중국 한나라 때 사용된 최초의 연호는 무제(武帝)의 ‘건원(建元)’이라는 연호인데, 이것은 근원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예컨대 광개토 대왕은 영락 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하였는데 ‘영락’이 연호였다.23)박성봉,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왕호(王號)와 세계관(世界觀)」, 『고구려 연구』 2, 고구려 연구회, 1996.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고려에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연호를 받아다 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서서 독자적인 연호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은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였으므로 연호를 만들지 않고 중국에서 받아다 쓴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후기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조선도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조선이 독자적인 연호를 쓰게 된 계기는 강화도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제의 무력 협박에 의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자주 독립국 조선이 일제와 주체적으로 조약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 예컨대 강화도 조약의 제1조에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청나라와의 예속(隷屬) 관계를 단절한다는 의미였다. 강화도 조약 제1조에서 ‘조선국은 자주 국가’라고 하였으므로, 이 조약문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개국 연호(開國年號)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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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연호를 쓴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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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연호를 쓴 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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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연호는 조선이 건국된 해를 원년으로 보고 그로부터 몇 년째인지를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고종 13)은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485년째이므로 ‘개국 485년’이라고 하였다. 이후 외국과의 조약문에서는 개국 연호가 이용되었다.

개국 연호는 이른바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국내 공문서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7월 1일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는 향후 공문서에서 ‘개국 기년(開國紀年)’을 쓰자고 건의하여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1895년(고종 32) 3월 19일에 내무아문(內務衙門)은 각 도에 훈령을 보내 ‘개국 연호’를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에서도 개국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개국 연호는 단순히 조선을 개국한 이후 몇 년이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의미의 연호라고 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독자적인 연호가 제정되었는데, 그것은 ‘건양(建陽)’이었다. 이 연호는 1895년의 이른바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제정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독립과 개화라는 미명하에 조선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책동하였는 데, 고종에게 황제에 즉위할 것과 연호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기를 거부하였지만, 결국 타협으로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였던 것이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 11월 15일에 연호를 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바로 당일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 김홍집(金弘集)이 ‘건양’이라는 연호를 올렸다. 이 ‘건양’을 고종이 결재함으로써 조선시대 최초의 연호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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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주 명의의 신임장
대군주 명의의 신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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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양’이라는 연호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추진된 을미개혁의 산물이었다. 을미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명성 황후는 시해(弑害)당하였고, 고종은 아관파천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건양이라는 연호는 조선의 자주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그래서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건양이라는 연호를 취소하고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게 하였다. 그것은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고종은 1897년(고종 34) 8월 13일에 명령을 내려 연호를 조사해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황제 즉위를 위한 사전 준비였다. 명령에 따라 의정부에서는 ‘광무(光武)’와 ‘경덕(慶德)’ 두 가지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광무는 무력(武力)을 강조하고 경덕은 인덕(仁德)을 강조한 것인데, 고종은 이 중에서 광무를 선택하였다. 당시 고종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 급선무라 판단해 광무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7년 8월 14일부터 광무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광무 연호가 결정된 이후 고종이 황위에 오름으로써 광무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연호가 되었다. 고종 황제 이후 순종 황제는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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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연호를 쓴 초청장
광무 연호를 쓴 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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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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