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5. 국왕을 이름으로 심판하라
  • 이름으로 일생을 심판한다, 시호
신명호

조선시대 왕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수많은 호칭을 받았다. 시호(諡號), 묘호(廟號), 능호(陵號), 전호(殿號), 추상존호(追上尊號), 추상시호(追上諡號) 등이 그것이었다.

이 중에서 시호는 왕의 사후에 왕의 생전 언행을 참조하여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일반 신료들이 받는 시호와 동일하였다. 그러나 왕의 시호는 중국 천자에게서 받는 것과 신하들이 올리는 것의 두 가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호와 달랐다.

시호는 이름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산물이었다. 살아생전 훌륭한 공덕을 쌓은 사람의 인생을 찬양하기 위해 죽은 후에 특별히 올리는 호칭이 시호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시호를 받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었다. 벼슬이 높거나 아니면 공덕이 높아야 하였다. 신료들이 시호를 받으려면 벼슬이 2품 이상이어야 하였다. 아니면 국난에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거나 유학의 발전에 커다란 공을 세워야 하였다.28)유상근,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증시 제도(贈諡制度)」, 『상은 조용욱 박사 송수 기념 논총(象隱趙容郁博士頌壽紀念論叢)』, 상은 조용욱 박사 고희 기념 사업회, 1971 ; 신용호, 「선현(先賢)들의 시호(諡號) 연구」, 『공주 사대 논문집』 27, 공주 사범 대학교, 1989 ; 박홍갑, 「조선시대의 시호 제도」, 『한국 중세 사회의 제 문제(諸問題)』, 2001.

조선시대에 신료들에게는 왕이 시호를 내려 주었다. 왕은 고관대작(高官大爵)이 죽거나 또는 공덕이 높은 백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공덕을 기려 두 글자의 시호를 내려 주었다. 예컨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라고 할 때, 충무(忠武) 두 글자가 시호였다.

조선시대의 왕은 신료들에게 시호를 주기도 하였지만 받기도 하였다. 왕의 시호는 국상이 난 지 5일이 지난 후, 즉 빈전(殯殿)에 재궁(梓宮)을 모신 후에 신료들이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 또는 왕비의 시호를 결정하는 시한이 확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빈전에 재궁을 모신 당일에 하거나 또는 며칠 있다가 하거나 아니면, 달을 넘기고 다음달에 하는 등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빈전에 모신 후에 한다는 원칙은 분명하였다.

시호를 결정하는 첫 단계는 죽은 자의 삶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기록하는 것이었다. 행장(行狀)이라고 하는 글이 그것인데, 행장은 죽은 사람의 일생을 자세하게 기록한 글이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가 세상에서 한 온갖 말과 행동을 모아서 행장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왕의 행장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대제학(大提學)이 짓고 최종적으로 의정부의 정승들이 검토하여 결정하였다. 행장이 완성되면 중국에 사신을 보내 시호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사신의 이름이 청시사(請諡使)였다. 북경에 도착한 청시사는 조선에 국상이 난 사실을 알리고, 아울러 시호를 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시호 두 글자를 결정하여 보냈는데, 예컨대 태조의 강헌(康憲), 세종의 장헌(莊憲) 등이었다.

조선 자체에서 결정하는 왕의 시호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를 모아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이를 검토하여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의정부에는 2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여서 시호를 의논하였는데, 어느 때는 5품 이상의 관료들이 모두 참여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모여서 네 자 또는 여섯 자 또는 여덟 자의 시호를 결정 하였는데, 여덟 자의 경우가 가장 많았다. 특별한 공적이 있는 왕의 경우에는 네 자를 더하여 12자의 시호를 올리는 수도 있었다. 이렇게 결정된 시호를 왕에게 보고하면, 왕이 검토하고 별 이견이 없을 경우 재가하였다. 만약 불만이 있으면, 왕은 다시 의논하여 올리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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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시호망(諡號望)
숙종의 시호망(諡號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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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세조의 시호를 정할 때, 의정부에서 ‘열문영무 신성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의 여덟 자를 정하여 올리자 예종은 “승천체도(承天體道) 네 자는 본래 존호(尊號)인데, 지난번에는 이 네 자를 시호에 넣겠다고 하였다가 지금 없앴다. 이는 나를 속인 것이다. 지난번에 한계희에게 글자 수에 구애되지 말라고까지 하였는데 왜 여덟 자로 하였는가? 내가 어리다고 그런 것인가?”29)『예종실록』 권1, 예종 즉위년 9월 경진(24일). 하고 질책하였다. 이에 의정부에서 다시 시호를 의논하여 ‘승천체도 지덕융공 열문영무 성신명예인효(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의 18자를 올렸다. 여덟 자에 비해 무려 배 이상이 늘어난 수이다. 예종은 이것도 적다고 하여 인효(仁孝) 위에 의숙(毅肅) 두 글자를 더하여 20자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세조의 시호는, ‘승천체도 열문영무 지덕융공 성신명예 의숙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懿肅仁孝)’의 20자로 결정되었다. 이 중 ‘승천체도 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의 여덟 자는 김종 서 등을 몰아내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를 찬양하기 위해, 세조가 생존해 있을 때 신료들이 올린 존호(尊號)였다. 그러므로 세조가 사후에 받은 시호는 12자였다.

시호가 결정되면, 이를 옥에 새겨 책으로 만들고 아울러 도장으로 새겼다. 여러 편의 옥에 시호를 새겨서 책으로 만든 것을 시책(諡冊)이라고 하였다. 시책에는 시호 그리고 그 시호에 드러난 왕이나 왕비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을 실었다. 시호를 도장에 새긴 것은 시보(諡寶)였다. 시보에는 시호만 새기고 다른 내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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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시책(仁宗諡冊)
인종 시책(仁宗諡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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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결재를 받은 시호는 시책과 시보로 만들어 종묘에 고하고 허락을 요청하였다. 이런 의식을 ‘청시종묘의(請諡宗廟儀)’라고 하였다. 종묘에 시호를 요청하는 의식이란 의미였다. 유명을 달리한 왕의 일생을 평가하는 시호의 최종 결정권을 종묘의 조상신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시호는 청시종묘의를 거침으로써 완전히 결정되었다. 이렇게 결정된 시호는 빈전에 함께 모셨다. 시호를 새긴 시책과 시보를 빈전에 올리는 의식은 ‘상시책보의(上諡冊寶儀)’라 하였다. 이 의식을 통하여 시책과 시보는 장례 이전까지 혼백을 모신 영좌 앞에 함께 모셔 두었다.30)신명호, 『궁중 문화-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돌베개, 2002.

시호는 사후에 특정 업적이 재평가되면 다시 올리기도 하였다. 마치 존호를 다시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재평가 결과 다시 올리는 시호는 추상시호(追上諡號)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추상시호도 추상존호와 마찬가지로 더욱더 늘어났다. 그것은 후대 왕들이 자신의 존호를 받거나 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릴 경우에 으레 선대왕에게 존호나 시호를 추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추상존호와 추상시호는 선대왕에 대한 엄밀한 재평가 결과라기보다는 의례적인 행사로 변질되어 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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