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5. 국왕을 이름으로 심판하라
  • 종묘에서 부르는 이름, 묘호
신명호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대표 호칭은 묘호(廟號)였다. 묘호는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란 의미이다.31)임민혁, 「조선시대 종법제하(宗法制下)의 조·종(祖·宗)과 묘호(廟號)」, 『동서 사학』 8, 한국 동서 사학회, 2001 ; 임민혁, 「조선시대의 묘호(廟號)와 사대 의식(事大意識)」, 『조선시대사 학보』 19, 조선시대사 학회, 2001. 예컨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이 묘호였다. 이 묘호는 왕의 재임 시 업적에 대한 후세의 평가였다.

묘호는 두 개의 글자로만 이루어졌다. 앞의 글자는 각각 다르지만, 뒤의 한 글자는 조(祖) 아니면 종(宗)으로 되어 있었다. 두 글자로 된 묘호는 철저하게 왕의 업적을 기준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묘호를 통하여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이 살아생전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시호가 죽은 자의 일생을 평가하고 그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 생전의 업을 심판하는 것이었다면, 묘호도 살아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시호와 묘호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다만 시호는 한 인간으로서 왕이나 왕비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데 비하여 묘호는 왕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래서 묘호는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세의 사람들이 내리는 일종의 업무 평가서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묘호는 오직 왕만이 가질 수 있었다.

확대보기
성종 금보
성종 금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성종 금보
성종 금보
팝업창 닫기

묘호는 철저하게 뒤를 이은 왕 및 신료들이 결정하였다. 시호는 일생에 대한 평가로서 종묘에 고하여 조상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상징 절차가 있었지만, 묘호는 그런 상징 절차도 없었다. 단지 신료들이 의논하고 이에 대해 왕이 결재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후임자들이 전임자의 업무 수행을 평가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정하는 것과 같았다. 묘호도 시호와 마찬가지로 빈전에 재궁을 모신 이후에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시호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2품 이상의 재상(宰相)들이, 그 자리에서 묘호도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었다.

왕의 업적을 평가하는 항목은 두 가지였다. 공(功) 아니면 덕(德) 둘 중의 하나였다. 하늘을 대신해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사실 공 아니면 덕이라 할 수 있었다. 공은 이 땅의 무질서와 혼돈을 바로잡는 대업을 이룬 경우였다. 이에 비해 덕은 선대의 왕들이 확립한 훌륭한 정치 이념을 계승하여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계속 이어 간 경우였다.

왕의 공을 표시하는 글자는 조(祖)였다. 묘호에 조가 들어간 왕은 혼란기에 국가를 창업하였거나 중흥시킨 대업을 완수한 왕으로 평가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왕의 덕을 표시하는 글자는 종(宗)이었다. 종이 들어가는 묘호를 받은 왕은 조가 들어가는 묘호를 받은 왕에 비해 선대의 정치 노선을 평화적으로 계승하여 통치한 왕으로서 평가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왕의 업적을 공과 덕 단 두 가지만 가지고 평가하면 구체성을 잃게 마련이다. 이에 조나 종 앞에는 공과 덕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주는 하나의 글자를 더 붙였다.

묘호는 국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서와 같았으므로, 서로 간에 평가 의견이 다를 수 있었다. 신료들 간에도 의견이 다르거나 아니면 신료들이 올린 평가 의견에 왕이 동의하지 않는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몇 십 년 지난 후대 사람들이 전대의 평가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으므로 2품 이상의 재상들이 왕에게 세 가지의 묘호를 추천해 보고하면, 왕이 그 중에서 판단하여 선택하였다. 왕은 추천된 세 가지 묘호 중에서 첫 번째 묘호를 선정하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특히 비상한 방법으로 왕이 된 사람들의 경우, 그 방법과 공과를 평가해야 할 때 그렇게 되는 수가 많았다. 예컨대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므로 조선시대의 관행으로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카 단종을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 세조가 단종을 쫓아낸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할 지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신료들이나 후계왕의 평가 의견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조의 묘호가 결정되는 과정은 이런 경우를 잘 보여 준다.

세조가 승하한 후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신료들은 관행대로 예종에게 세 가지 묘호를 추천하였다. 그것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이 세 가지 묘호에는 조(祖) 자가 들어간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는 당시의 신료들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대업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한 정황을 보여 준다.

삼망(三望)을 보고 받은 예종은 심기가 몹시 상하였던 듯하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세조의 왕위 등극이 대업으로 평가받아야 떳떳하였다. 신하들을 부른 예종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국가를 중흥시킨 공을 일국의 신민으로서 누가 알지 못하는가? 묘호를 세조(世祖)로 할 수 없는가?” 하고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예종은 ‘국가를 중흥시킨’ 공이 있으므로 당연히 조 자를 넣어야 된다고 요구한 것이었다. 이에 신료들은 “세조는 우리나라에 세종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중국의 한(漢)나라 때에도 세조와 세종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대행 대왕을 세조로 한다고 해서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32)『예종실록』 권1, 예종 즉위년 9월 경진(24일). 하고 재차 질책하였다. 예종이 즉석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묘호를 세조로 내심 결정해 놓고 그에 대한 사전 조사를 끝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종의 질책을 받은 신료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벌을 내려 달라고 하였다. 예종은 다시 묘호를 의논해 올리라고 명령하였고, 그 결과 다시 세조로 묘호를 의논해 올렸다. 세조의 경우 만약 예종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묘호는 신종이 되었을 것이다.

확대보기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영종대왕실록』과 『실록청의궤』
팝업창 닫기

이 밖에 조선시대 왕의 묘호 중에는 후대에 변경된 것도 적지 않다. 예컨대 선조, 영조, 정조, 순조는 모두 후대에 묘호를 바꾼 경우이다. 이들의 최초 묘호는 선종(宣宗), 영종(永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왕조 실록』도 제목이 『선종실록(宣宗實錄)』, 『영종실록(永宗實錄)』, 『정종실록(正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이다. 이들의 묘호가 종에서 조로 바뀐 이유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점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선종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 영종은 유학을 부흥한 공, 정종은 유학을 보호하고 이단(異端)인 천주교(天主敎)를 배척한 공, 순종은 사학(邪學)을 배척한 공이 인정되어 종 자를 조 자로 바꾼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특정 왕의 묘호가 후대에 바뀐다는 것은 그 왕의 업무 수행이 후대에 재평가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묘호는 종묘에서 부르는 호칭이므로 종묘에 봉안한 신주(神主)에다가 새겼다. 묘호를 새긴 신주를 연주(練主)라고 하였다. 연주는 초상이 난 이듬해에 연제(練祭)라고 하는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새로 만드는 신주였다. 연제를 지낸 후 후손들은 초상이 난 이래 줄곧 입고 있던 상복을 벗고 부드러운 실로 새로 지은 연복(練服)이라고 하는 옷을 입었다. 이때 후손들만 새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있던 신주를 없애고 새로 신주를 만들어 조상의 혼령도 새 집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었다. 연주는 밤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율주(栗主)라고도 하였다. 연주는 종묘로 옮기기 전까지는 혼전에 모셨으며, 연주를 만드는 날에 기왕의 신주는 종묘 뒤뜰의 으슥한 곳에 파묻었다.

연주의 크기는 길이가 대략 30㎝, 가로와 세로가 각각 16㎝ 정도였다. 일반 신주는 넓적한 나무판 모양이지만, 연주는 정사면체의 밤나무 토막을 깎아 만든 팔면체의 형태였다. 윗부분은 사람의 머리처럼 둥글게 하여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 것과 같았다. 연주에는 위, 아래 그리고 옆에 사방으로 통하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구멍을 뚫는 이유는 왕이나 왕비의 혼령이 쉽게 들어와 의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연주는 잣나무로 만든 상자인 궤(匱)에 넣어 보관하였다. 나무 상자의 본체는 내궤(內匱)라고 하고 뚜껑은 외궤(外匱)라고 하는데, 궤의 안과 밖을 붉은 비단으로 감싸서 보관하였다.

연주에는 시호, 묘호, 생전에 받았던 존호 등을 모두 썼다. 만약 세월이 흐른 뒤에 후손들이 왕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존호 등을 더 올리면 기존 내용을 지우고 새로 썼다. 왕이나 왕비의 신주 중에서 묘호를 쓰는 것은 오직 연주뿐인데, 그것은 연주를 나중에 종묘에 모시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연주를 쓸 때 하륜(河崙)이 나무에 글자를 새기고 도금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성석린(成石璘)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태종이 성석린의 견해를 받아들여 조선시대 왕의 연주는 도금하지 않고 먹으로 썼다.

시호는 신료들이 올린 것과 중국에서 내려 준 것을 모두 썼는데, 중국에서 내려 준 시호, 왕과 신료들이 결정한 묘호, 신료들이 올린 시호의 순으로 썼다. 만약 중국에서 시호를 늦게 보내면 추후에 다시 고쳐서 썼다. 혼전에 모셨던 연주는 삼년상이 끝나는 날 종묘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종묘의 연주에 의지한 왕이나 왕비의 혼령은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 주는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그 왕은 바로 종묘에 모셔 놓은 연주에 쓰인 묘호로 기억되었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