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1. 국왕 즉위식의 유형
  • 선위
김문식

조선시대의 국왕 가운데 선위에 의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다.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예종, 순종이 그들인데 대부분의 경우 선왕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선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태조가 정종에게 선위하거나 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한 것은 태종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면서 강제로 이루어진 경우이고,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한 것도 숙부인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억압하여 선위를 받은 경우에 해당한다.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한 것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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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어진
세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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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것이나 세조가 예종에게 선위한 것은 선왕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서였다. 그러나 세조는 선위를 한 그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선위에 의해 왕위를 계승한 국왕은 세종뿐이라고 하겠다. 이하에서는 세종의 즉위식 절차를 검토하기로 한다.

세종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불과 2개월 만에 국왕이 되었다. 이는 세종이 22세 때의 일인데, 세종으로서는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격적으로 국왕이 되었다. 1418년(태종 1) 8월 8일에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고, 국왕의 대보(大寶)와 홍양산(紅陽傘)을 가져와 왕세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태종은 왕비와 함께 자신이 왕세자 시절에 거처하던 세자전으로 나가 버렸다. 왕세자와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태종은 이를 듣지 않았고, 이튿날 세자가 문안을 청해도 만나 주지 않았다.

8월 10일에 태종은 국왕의 가마와 의장(儀仗), 시위군(侍衛軍)을 보내 왕세자를 맞아 오게 했다. 그런데 왕세자가 세자용 의장인 오장(烏杖)과 청양산(靑陽傘)을 앞세우고 오자 만나지 않았다. 왕세자가 부득이 국왕용 의장인 주장(朱杖)과 홍양산을 앞세우고 오자, 태종은 왕세자를 맞이하여 익선관(翼善冠)을 직접 씌워 주었다. 이어서 태종은 왕위를 물려준다는 전위(傳位) 교서를 반포했다. 자신의 질병이 심해져 정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왕위를 물려주지만, 군대와 국가의 중요한 사무는 자신이 계속 맡겠다는 내용이었다.

세종의 즉위식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거행되었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은 신하들이 품계(品階)에 맞춰 도열했고, 왕세자는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갖춰 입고 왕위에 올랐다. 이어서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을 비롯한 백관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국왕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날 세종은 상왕(上王, 정종)을 높여서 ‘태상왕(太上王)’이라 하고, 부왕(父王, 태종)을 상왕, 모후(母后)를 대비라 했으며, 부인 경빈(敬嬪)을 왕비로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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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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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내부
덕수궁 중화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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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에 세종은 즉위 교서를 반포하여 태조와 태종이 이루어 놓은 법도를 따라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세종의 즉위식이 마무리되는 순간 이었다. 실록을 보면 『태종실록』은 세종이 즉위한 다음날인 8월 11일의 기사까지 기록했고, 『세종실록』은 세종이 즉위 교서를 반포하는 것에서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를 보면 왕위가 계승되는 시점은 즉위 교서를 반포하는 순간을 기준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한 것은 대한제국기에 이루어졌으므로 국왕 즉위식이 아니라 황제의 즉위식이었다. 그렇지만 고종의 선위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고, 형식도 원래는 선위가 아니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령한 것이었다. 따라서 순종의 황제 즉위식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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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영친왕)
영왕(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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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18일(양력)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군대와 국가의 중요한 사무를 대리(代理)할 것을 지시했다. 황태자가 이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두 차례나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월 19일에 환구단(圜丘壇), 종묘(宗廟), 사직(社稷) 등에서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렸고, 대리청정에 관한 고종의 조서(詔書)가 반포되었다. 경운궁(慶運宮) 중화전(中和殿)에서는 황태자의 대리청정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매우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순종실록』에서는 7월 19일에 대리청정을 했고 그대로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았다고 기록했다.

7월 22일에 순종은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공문서에서 ‘대리’라는 용어 대신에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8월 2일에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또한 8월 7일에는 아우인 영왕(英王)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의 황제 즉위식은 8월 22일에 경운궁 돈덕전(敦德殿)에서 거행되었다. 순종이 황제 위에 오르자 신하들이 축하를 했고, 순종은 즉위 조서를 반포하고 사면령 (赦免令)을 내렸다. 이날 순종은 사망한 순명비(純明妃) 민씨와 황태자비 윤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를 보면 순종의 즉위식은 고종이 선위한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고, 순종이 먼저 황제로서의 실권을 행사한 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순서를 밟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고종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이후에는 황제로서의 모든 권한이 정지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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