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1. 국왕 즉위식의 유형
  • 반정
김문식

반정(反正)이란 왕위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국왕의 후계자에게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계승되는 경우를 말한다. 반정이 일어나면 국왕은 왕위에서 밀려나 군(君)의 지위로 격하되며,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왕실의 가족이 새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런데 반정의 경우에는 사전 준비 없이 있다가 갑자기 즉위식이 치러지게 되므로 의식이 매우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넓은 의미에서 반정에 해당한다. 1392년 7월 12일에 고려 공양왕은 태조의 사제(私第)로 찾아 가서 태조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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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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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 이성계)이 있지 않았으면 내(공양왕)가 어찌 여기에 이르겠는가? 경의 공과 덕을 내가 감히 잊겠는가. 황천(皇天)이 위에 있고 후토(后土)가 곁에 있으니, 대대로 자손들은 서로 해치지 않을 것이다.35)『태조실록』 권1, 총서(總序).

그런데 같은 날 배극렴(裵克廉) 등은 왕대비에게 아뢰어 공양왕을 폐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왕대비의 교지가 선포되자 공양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원주로 갔고, 공양왕을 대신하여 왕대비가 고려국의 국새(國璽)를 가지고 모든 정사를 처리했다. 이튿날 대비는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임명했다.

7월 16일에 배극렴, 조준(趙浚) 등은 대비에게서 국새를 받아 가지고 이성계의 처소로 가서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태조는 이튿날 말을 타고 수창궁(壽昌宮)으로 들어왔고, 어좌에는 앉지 않고 기둥 안쪽에 서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새 국왕의 즉위식치고는 너무 간략하고 어설픈 의식이었다. 이날 태조는 신료들에게 예전처럼 정무를 볼 것을 당부한 다음 자택으로 돌아갔다. 태조가 즉위 교서를 반포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7월 28일이었다.

8월 1일에 태조는 다시 궁으로 들어와 신하들의 조회(朝會)를 받았다. 그러나 이때에도 태조는 여전히 어좌에 앉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조회를 받았다. 8월 7일에 태조는 부인 강씨를 현비(顯妃)로 정하고 여러 왕자를 군(君)으로 봉했다. 태조가 처음으로 어좌에 앉아서 조회를 받은 것은 8월 11일이었다. 7월 17일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태조는 겸양의 표시로 한 달 가까이나 자리에 서서 조회를 받았는데, 이날 마침내 어좌에 앉아 조회를 받았다. 따라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특별한 즉위식이 없이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정권을 바꾸는 반정은 두 번 발생했는데,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먼저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한밤중에 시 작되었다.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 훈련원에 모인 다음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가서 담장 밖을 둘러쌌다. 그러자 왕궁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 버렸다. 반정군은 내시를 통해 연산군에게 대보를 내놓고 동궁(東宮)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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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
연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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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날이 밝자 반정군은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왕대비(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모친인 정현 왕후)에게 국왕이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길 수 없으므로 천명(天命)과 인심이 귀의하는 진성 대군(晋城大君, 중종)을 맞아들여 국왕의 대통(大統)을 잇게 할 것을 요청했다. 왕대비는 연산군의 세자에게 후사를 잇도록 하자고 했지만 반정군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은 왕대비의 전지(傳旨)를 받아 가지고 진성 대군의 사제로 가서 상황을 보고했고, 대군은 몇 차례 사양하다가 이를 허락했다. 한편 연산군은 시녀를 통해 국왕의 대보를 상서원(尙瑞院) 관원에게 내다 주게 했다.

새 국왕의 즉위식은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는데, 중종 은 익선관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어 입고 즉위식에 임했다. 원칙대로라면 국왕의 대례복인 면류관에 구장복을 입어야 했지만, 반정이 급작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미처 국왕의 복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즉위식은 백관들이 반열에 따라 정렬한 상태에서 먼저 왕대비의 자지(慈旨)가 선포되었다. 대소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진성 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이전 국왕인 연산군을 폐위하여 교동(喬桐)에 안치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국왕이 대보를 전달받았고 백관의 축하를 받은 이후에 사면령을 반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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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 초상
이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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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식이 끝나자 중종은 대비의 명을 따라 전왕(前王)을 폐위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거처를 교동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때 연산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상태로 가마를 타고 궁을 빠져 나왔다. 또한 중종은 연산군이 사용하던 ‘헌천홍도(憲天弘道)’라 새겨진 금인(金印)과 상서원에 보관하던 화압(花押), 승명패(承命牌)를 모두 철폐시켰는데, 이는 전왕의 권한이 모두 정지되었음을 의미했다. 연산군의 가족에 대한 조치도 내려졌다. 왕비 신씨를 폐위하여 사제로 내보내고, 왕세자와 왕자들을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왕비 신씨는 연산군을 따라 교동으로 갈 것을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정이 성공한 이후에는 반정 공신들을 표창하는 녹훈(錄勳)이 있었다.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신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녹훈되었는데,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여덟 명이 1등 공신, 운수군(雲水君) 등 13명이 2등 공신, 고수겸(高守謙) 등 31명이 3등 공신, 변준(卞儁) 등 65명이 4등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훗날 조광조는 정국공신에 너무 많은 인원이 녹훈되었다고 비판하며 운수군 등 76명의 공훈을 삭제했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 생했다.

한편 인조반정은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이 반정을 주도했지만, 주인공인 능양 대군(綾陽大君, 인조)도 처음부터 적극 가담했다. 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반정군은 홍제원(弘濟院)에서 군대를 집결시켰고 능양 대군은 연서역(延曙驛)에 주둔했다. 이들은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진입했고, 창덕궁(昌德宮)의 돈화문(敦化門)을 열고 궐내로 들어갔다. 앞서 중종반정 때 반정군이 궁궐을 포위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과는 달랐다. 궁 안으로 진입한 반정군들은 국왕의 침전에 들어가 광해군을 찾았는데, 실수로 횃불이 주렴(珠簾)에 옮겨 붙어 인정전만 남기고 모든 건물이 불탔다. 이때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에 사다리를 놓고 궁궐 담을 넘어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信)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결국 안국신의 고발로 잡혀 오는 몸이 되었고, 왕세자는 장의동 민가에 숨었다가 군인에게 붙들려 왔다.

3월 13일 아침에 능양 대군은 인정전 계단 위의 호상(胡床)에 앉아 신하들의 배례를 받았고, 이어 경운궁(慶運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방문하여 어보(御寶)를 올렸다. 어보는 궁궐이 불탈 때 군인이 창덕궁 후원에서 습득하여 바친 것이었다. 궁궐에 진입한 직후 능양 대군은 사람을 대비에게 보내어 반정 사실을 알리고 창덕궁으로 모셔오도록 했다. 그러나 대비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고, 부득이 능양 대군이 직접 대비를 방문했다. 능양 대군이 대비를 방문할 때에는 말을 탔고, 광해군은 작은 가마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인목 대비는 선왕인 선조의 허좌(虛座)를 설치한 방에서 능양 대군을 맞았고, 그곳에서 승전색(承傳色) 김천림(金天霖) 등에게 명하여 어보를 능양 대군에게 전하게 했다. 궁궐의 정전에서 공식적인 즉위식을 통해 전달되어야 할 어보가 이렇게 전달된 것이다. 이어서 대비는 광해군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유폐시키기까지 한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무척이나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을 폐위시키기는 해도 죽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대비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능양 대군은 경운궁에 그대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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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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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에 대비는 능양 대군에게 국왕의 지위를 계승하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고, 인조는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은 다음 사면령을 내렸다. 이날 전왕을 폐하여 광해군(光海君)으로 삼았고, 왕세자는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이후 광해군과 세자는 모두 강화도에 안치되었는데, 폐비 유씨와 폐빈 박씨는 모두 남편을 따라갔다. 인조가 국왕의 법복(法服)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월 16일부터였다.

인조반정으로 성공시킨 공신들은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정사공신은 김류, 이귀, 김자점 등 10명이 1등 공신, 이괄(李适) 등 15명이 2등 공신, 박유명(朴惟明) 등 28명이 3등 공신에 녹훈되었는데, 이괄은 자신의 녹훈이 1등에서 2등으로 강등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반정으로 인한 국왕의 즉위식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중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졌지만 국왕의 법복을 갖추지 못했고, 인조는 아예 즉위식 없이 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에서 융복(戎服)을 입은 채 어보를 받는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들이 국왕으로 즉위할 때에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왕대비의 인가를 받는 절차가 필요했는데, 이 경우에도 왕대비가 모든 결정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무력으로 이루어진 반정을 추인(追認)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반정으로 인한 왕위의 계승이 정상적이지 않듯이 국왕의 즉위식 또한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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