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2. 국왕을 계승하는 왕실 가족
  • 왕세자
김문식

조선의 27대 국왕36)순종은 처음부터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했기 때문에 국왕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시대 전체를 언급하기 위해 27대 국왕이라고 했다. 가운데 정상적인 과정으로 국왕이 된 경우는 일곱 경우에 불과하다. 여기서 정상적 과정이란 국왕의 적장자(嫡長子)로 태어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를 말하는데,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순조와 헌종은 서장자(庶長子)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이므로 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총 아홉 경우가 된다. 조선시대의 왕위는 안정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장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국왕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은 여덟 경우가 있는데, 정종, 세조, 예종, 성종, 중종, 명종, 효종, 순조가 이에 해당한다. 이들 가운데 세조와 중종은 찬탈(簒奪)에 가까운 방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또한 태종, 명종, 영조는 형제가 왕위를 계승했고, 정종과 세종은 다른 사람이 왕세자로 정해져 있다가 문제가 생겨 교체되었으며, 선조, 철종, 고종은 국왕의 친척으로 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이는 모두 왕위의 계승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부왕보다 일찍 사망함으로써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세조의 아들인 의경 세자(懿敬世子, 덕종), 명종의 아들인 순회 세자(順懷世子), 인조의 아들인 소현 세자(昭顯世子), 영조의 아들인 효장 세자(孝章世子, 진종)와 사도 세자(思悼世子, 장조), 정조의 아들인 문효 세자(文孝世子), 순조의 아들인 효명 세자(孝明世子, 익종)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는 왕세자로 책봉되어 국왕의 후계자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국왕에 즉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의경 세자, 효장 세자, 사도 세자, 효명 세자는 사후 그들의 후손에 의해 국왕으로 추존됨으로써 왕세자에서 국왕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를 보면 왕세자는 국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음을 알 수 있다.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왕세자가 아니면서 사후에 국왕으로 추존된 사례가 있다. 인조의 생부인 원종이 그 주인공인데, 원종은 선조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진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1623년에 정원군의 첫째 아들인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국왕이 되자 정원군은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되었고, 1627년(인조 5)에는 국왕으로까지 추존되었다. 그러나 왕세자가 아닌 군(君)이 국왕으로 추존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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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책례계병(文孝世子冊禮契屛)
문효세자책례계병(文孝世子冊禮契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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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문종의 사례를 통해, 국왕의 적장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문종은 1414년(태종 14) 10월에 세종과 소헌 왕후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인 세종은 충녕 대군(忠寧大君)으로 있었기 때문에 문종은 궁궐 안이 아니라 한양의 사저(私邸) 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418년에 태종이 전격적으로 세종을 왕세자로 발탁하고 불과 2개월 만에 왕위까지 물려주자 문종의 지위도 급속도로 변했다. 세종이 국왕이 되면서 문종은 원자(元子)가 되었고, 1421년(세종 3) 10월에는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이때 문종의 나이는 8세였다.

문종의 왕세자 책봉식은 1421년(세종 23) 10월 27일에 거행되었다. 이날의 의식은 국왕과 왕세자는 물론이고 대군과 종친, 문반(文班), 무반(武班) 관리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고, 국왕과 왕세자는 대례복인 면복을 갖추어 입었다. 여기서 면복이란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을 말하는데, 국왕은 구류면(九旒冕)에 구장복(九章服)을 착용했고 왕세자는 칠류면에 칠장복을 착용했다. 같은 면복이었지만 국왕과 왕세자 사이에는 위격의 차이가 있었다.

책봉식의 하이라이트는 국왕이 왕세자에게 교명(敎命)과 책(冊), 왕세자인(王世子印)을 하사하는 장면이었다. 이들은 모두 왕세자임을 상징하는 물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책문(冊文)에는 학업을 연마하고 덕성을 쌓아 모든 백성들을 편하게 해 줄 방도를 마련하라는 세종의 당부가 담겨 있었다.

후계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 것은 공통되는 규정이고, 명분을 바로잡아 사람의 마음을 잇는 것은 공의(公義)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일을 상고하여 이에 떳떳한 장전(章典)을 거행한다.

너 이향(李珦, 문종)은 지각이 일찍 자라고 학문이 날로 나아지고 있다. 어질고 명랑한 자질은 국가의 신기(神器)가 귀의하는 곳이고, 적자(嫡子)의 높은 자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귀속되는 곳이다. 좋은 날을 맞아 종묘에 알현하고 울창주(鬱鬯酒)를 부어 조상을 계승하면서 너를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하늘은 친한 데가 없이 오직 덕(德) 있는 자를 도와준다. 어질게 베풀어 만백성을 보살피는 대권을 받고, 검소하고 너그러워 나라의 경사가 넘치게 하라.37)『세종실록』 권13, 세종 3년 10월 병진(27일).

왕세자 책봉식을 마친 세종은 신하들에게 교서를 반포했다. 왕세자 책봉식이 이루어졌음을 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백성들과 경사를 함께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태조께서 처음 건국의 업적을 여셨고, 우리 부왕이신 성덕신공(盛德神功) 태상왕(太上王) 전하(태종)께서 크게 천명을 이어받아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셨다. 나는 그 실마리를 이어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편히 하려 하지 않았다. 아, 세자를 일찍 세워 종묘를 이어받고 인심을 연계시켜야 한다. 원자 이향(李珦)은 지위가 적장자의 자리에 있고 성품이 아름답기 때문에 후계자의 자리에 있게 한다. 이미 영락 19년(1421) 10월 27일에 왕세자에 책봉하여 책(冊)과 보(寶)를 주었다. 이 예(禮)가 이루어졌음을 내외에 포고하여 만백성들과 큰 경사를 함께 하려고 한다.38)『세종실록』 권13, 세종 3년 10월 병진(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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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어필
문종의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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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세종 24)에 세종은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했고, 1449년(세종 31)에 왕세자는 국가의 중대사인 세 가지 업무를 제외하고는 국왕의 모든 업무를 직접 처리했다. 1450년(세종 32) 세종이 사망하자, 오랜 기간 대리청정을 해 오던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는 이때 비로소 국왕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오래전부터 국왕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 문종이 국왕이 되어 달라진 것은 거처를 내전(內殿)으로 옮기고 정사를 볼 때 남면(南面)을 하며, 2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임면권(任免權)을 추가로 가지는 정도였다. 문종은 가장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원자에서 왕세자를 거쳐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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