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2. 국왕을 계승하는 왕실 가족
  • 왕세제
김문식

왕세제란 국왕의 아우가 국왕의 후계자로 결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왕세제는 국왕의 아들이나 손자가 전혀 없어 왕세자나 왕세손을 책봉할 수 없는 경우에만 책봉되므로, 왕세제로 책봉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아우이면서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태종, 명종, 영 조가 있다. 이 중에서 정종은 아우인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후원으로 국왕이 되었고 게다가 자신의 후사도 없었기 때문에 1400년(정종 2)에 정안군을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또한 인종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 직전에 아우인 경원 대군(慶原大君, 명종)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명종은 대군으로 있다가 국왕이 된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국왕의 아우로 왕세제에 책봉되어 활동하다가 국왕이 된 경우는 영조밖에 없다.

그러면 영조가 국왕이 되는 과정을 검토해 보자.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9세에 훗날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되는 서종제(徐宗悌)의 딸과 결혼했다. 영조가 궁궐 밖으로 나온 것은 19세가 되는 1712년(숙종 38)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를 제외한 대군이나 군이 결혼을 하면 그와 동시에 궁궐 밖으로 나와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런데 숙종은 결혼을 한 연잉군이 궁 밖으로 나가는 날짜를 몇 차례나 연기했고, 연잉군이 궁궐을 나갈 때에는 양성(養性)이란 헌명(軒名)까지 지어 주었다. 숙종이 연잉군에게 각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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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초상
연잉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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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이 다시 궁궐로 돌아온 것은 1721년(경종 1)이었다. 숙종이 사망하자 왕세자이던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국왕의 유일한 아우인 연잉군을 왕세제에 책봉했던 것이다. 연잉군을 경종의 후사로 결정하려는 논의는 숙종 말년에 시작되었다. 1717년(숙종 43) 7월에 숙종은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기에 앞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과 독대(獨對)를 했는데, 이때 숙종은 왕세자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지만 그의 후사가 없으므로 연잉군을 후계자로 정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왕세제를 책봉하는 논의가 시작되면서 경종은 왕대비(숙종의 계비인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찾아가 이 문제를 의논했는데, 왕대비 역시 연잉군을 후사로 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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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명 초상
이이명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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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연잉군의 칭호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앞서 태종이 정종의 아우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책봉식을 담당한 예조에서는 중국에서 아우를 후사로 삼을 때 태제(太弟)로 봉한 사례를 들어 ‘왕세제’로 하자고 건의했다.

연잉군은 차례로 말하면 비록 아우이지만 지위로 말하면 후계자가 됩니다. 그런데 선왕의 고사에서 정종은 태종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제왕의 집안에서는 계승하는 순서(繼序)를 중하게 여기고 형제의 순서(倫序)는 도리어 가볍게 여겨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그때 태조께서 상왕(上王)의 지위에 있어 국왕이 눌림을 당하는 처지라 세자라 불러도 혐의가 없어 그런 것입니까? 오늘날의 형세는 그때와는 같지 않습니다.

자고로 역대 군주는 아우를 세워 후계자로 삼으면 모두 태제(太弟)로 봉했으니, 지금의 이름도 세제(世弟)로 정하는 것이 명분이나 예절에 부합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42)『경종실록』 권4, 경종 1년 8월 기묘(21일).

경종이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하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도 ‘왕세제’로 정하자고 의견을 올렸다.

오늘날 일의 형편이 정종 때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이 인종께서 편치 못하실 때 명종이 대군으로 있었는데, 세제로 봉하여 국본으로 정하자는 의논을 한 일이 있습니다. 연잉군의 위호(位號)는 왕세제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43)『경종실록』 권4, 경종 1년 8월 기묘(21일).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연잉군은 조선 최초의 왕세제가 되었다. 왕세제 영조가 왕세제빈과 함께 궁궐 안으로 들어온 것은 1721년(경종 1) 9월 6일이었다. 왕세제는 제일 먼저 왕대비와 국왕 부부에게 내관을 보내 문안을 여쭈었고, 자신들은 부친인 숙종의 신주를 모신 효령전(孝寧殿)으로 가서 참배했다. 왕세제 책봉식은 9월 26일에 거행되었다. 책봉식이 진행될 때에는 왕세제의 복식이 문제가 되었다. 책봉식은 길례(吉禮)에 해당하므로 대례복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숙종의 삼년상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상복을 입고 곡을 하던 자리에서 길복을 입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영조가 기지를 발휘했다. 영조는 책봉식 당일에 국왕에게 요청하여 시사복(時事服)을 입는 것으로 바꿈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1721년 10월에 왕세제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했고, 1724년 8월에 경종이 사망하자 6일째 되는 날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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