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
  • 3. 국왕을 대신하는 정치
  • 수렴청정
김문식

수렴청정은 새로 즉위한 국왕의 나이가 너무 어려 국정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경우에 왕실의 어른이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왕실의 어른이란 대왕대비나 왕대비를 말하는데, 대왕대비는 국왕의 할머니를 말하며, 왕대비는 국왕의 어머니를 말한다. 국왕의 증조모나 고조모도 모두 대왕대비가 된다. 수렴청정의 ‘수렴(垂簾)’은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국왕의 어좌 뒤에서 주렴(珠簾)을 드리우고 앉아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렴청정을 끝내고 국왕이 친정(親政)을 할 때에는 주렴을 거둔다는 의미의 ‘철렴(撤簾)’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모두 일곱 경우가 있었는데, 성종대의 정희 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 명종대의 문정 왕후(중종의 비), 선조대의 인순 왕후(명종의 비), 순조대의 정순 왕후(貞純王后, 영조의 비), 헌종대의 순원 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 철종대의 순원 왕후(순조의 비), 고종대의 신정 왕후(神貞王后, 익종의 비)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헌종과 철종이 즉위한 초기에 두 차례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다.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국왕의 나이는 8세에서 21세에 이르며, 수렴청정을 한 기간도 8개월에서 8년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서 순조와 헌종은 14세가 되었을 때 수렴청정을 끝내고 국왕의 친정(親政)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14세의 나이로 국왕이 되었던 숙종이 처음부터 친정을 한 것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주인공은 정희 왕후였다. 정희 왕후는 세조의 왕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였는데, 새 국왕인 성종에게는 할머니가 되었다. 1469년(성종 즉위년) 11월에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사망했을 때 예종에게는 원자가 있었다. 그렇지만 원자는 국왕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되자 후계자를 결정하는 권한이 왕실 어른인 정희 왕후에게 넘어갔고, 정희 왕후는 세조의 적손(嫡孫) 가운데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을 국왕으로 선택했다. 자산군의 친형인 월산군(月山君, 월산 대군)도 있었지만 월산군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고, 자산군은 일찍이 세조가 귀하게 여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확대보기
성종 어필
성종 어필
팝업창 닫기

세조의 적손으로는 의경 세자의 아들 두 사람이 있지만, 월산군 이정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그 아우인 자산군 이혈은 재질이 준수하고 숙성했으므로 세조께서 매양 자질과 도량이 뛰어남을 칭찬하면서 우리 태조에게 견주기까지 했다. 지금 나이가 장성하고 학문이 진보되어 큰일을 맡길 만하다.48)『성종실록』 권1, 성종 즉위년 11월 무신(28일).

자산군은 예종이 사망한 당일에 궁궐 안으로 들어와 국왕 즉위식을 거행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후계자가 성복을 한 뒤에 즉위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지만, 인심을 빨리 진정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따랐던 것이다. 당시 자산군 성종의 나이는 13세였다. 성종이 국왕이 된 직후에 예종의 아들은 원자에서 왕자로 신분이 바뀌었고,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

확대보기
신숙주 초상
신숙주 초상
팝업창 닫기

새로 국왕이 된 성종은 나이가 어린 데에다가 국정 경험이 전혀 없으므로, 고위 관리들은 대왕대비(정희 왕후)에게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왕대비는 자신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정사를 처리하기 어렵지만 자산군의 모친인 수빈(粹嬪)은 한자를 알고 사리(事理)에도 통달했으므로 국정을 다스릴 만하다고 양보했다.

내가 복이 적어서 자식(예종)의 흉사를 당했으므로 별궁으로 가서 스스로를 보양(保養)하려고 한다. 더구나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해 정사를 듣고 판단하기가 어려운데, 사군(嗣君, 성종)의 어머니인 수빈은 문자도 알고 사리도 알고 있으므로 이를 감당할 만하다.49)『성종실록』 권1, 성종 즉위년 11월 무신(28일).

대왕대비의 발언에 신하들은 강하게 반대했고 , 결국 대왕대비가 청정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처음에 대왕대비는 대비궁에 그대로 있으면서 내관(內官)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수많은 국정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국왕과 함께 자리한 상황에서 청정을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직접 청정하는 것에 대해 대왕대비는 자신이 한문을 읽지 못하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숙주(申叔舟)는 승지가 한문을 번역하여 대왕대비에게 보고하면 국정을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확대보기
광릉
광릉
팝업창 닫기

신숙주 : 지금 주상께서 나이가 어려 대비 전하께서 서무(庶務)를 직접 결단하시는데, 궁중에 깊숙이 거처하면서 내관에게 명령을 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상과 함께 정사를 듣고 결정하십시오. 수렴하여 청정을 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이며, 이렇게 한다면 주상의 견문도 날로 넓어지고 정사를 듣고 판단하는 것도 익숙해질 것입니다.

대비 :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니 정사를 듣고 판단하기가 어렵다.

신숙주 : 승지가 문자를 해석하여 아뢰면 듣고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대비 : 그렇다면 내가 직접 듣고 판단하겠다.50)『성종실록』 권2, 성종 1년 1월 임진(13일).

대왕대비 정희 왕후의 대리청정은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리 및 승지들과 정사를 의논한 다음 전지(傳旨), 전교(傳敎), 의지(懿旨) 등의 형태로 명령을 내렸고, 국왕의 경연(經筵)에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성종도 중요한 국사가 있으면 대왕대비께 아뢰어 방침을 들은 다음 이를 신하에게 하교 하는 방식으로 정무를 처리했으므로, 결국 정희 왕후의 대리청정은 성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간접 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대왕대비가 처음으로 철렴을 언급한 것은 1475년(성종 6) 12월의 일이었다. 당시 국정의 처리를 둘러싸고 대왕대비는 국왕과 미묘한 갈등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끝내겠다고 말한 것이다. 1476년 1월이 되자 대왕대비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는데, 이때에는 국왕 성종의 나이도 이미 20세가 되어 있었다. 대왕대비는 원상(院相) 정창손(鄭昌孫)에게 언문 편지를 내려 수렴청정을 끝내겠다고 했다.

내가 본래 지식이 없는데도 대신들이 굳이 청하고 주상께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마지못해 청정을 했던 것이다. 이제 주상께서 나이가 장성하고 학문도 성취되어 모든 정무를 판결하는 데 적당함을 얻게 되었다. 더구나 밖에는 정승과 육조, 대간이 있으니 내가 일찍이 사양하려 했으나 뜻밖에 중궁(中宮, 공혜 왕후)이 사망하여 궁중의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므로 시일을 미루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51)『성종실록』 권63, 성종 7년 1월 무오(13일).

조정의 중신들이 나서서 대왕대비를 만류했고, 국왕 성종도 이에 동참했다.

제가 학문이 성취되어 큰일을 결단할 만하다면 신하들이 당연히 저에게 정사를 돌려주기를 청할 것입니다. 지금은 원상(院相) 등이 저에게 정사를 돌려주지 말 것을 청하고 있으므로 이를 따르소서.52)『성종실록』 권63, 성종 7년 1월 무오(13일).

이후에도 고위 관리와 국왕의 요청이 계속되었지만 대왕대비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햇수로는 8년, 실제로는 6년 2개월에 걸친 대왕대비 정희 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확대보기
동궐도 중의 희정당 부근
동궐도 중의 희정당 부근
팝업창 닫기

수렴청정의 절목이 완전히 정비된 것은 1800년(순조 즉위년) 7월이었다. 이때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국왕인 순조에게는 증조모가 되었다. 순조는 선왕인 정조가 사망한 지 6일이 지난 1800년 7월 4일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날 순조는 면복을 갖춘 상태에서 정조의 빈전에서 국왕의 대보를 받았고,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즉위 교서를 발표했다. 그리고는 곧장 대왕대비 정순 왕후를 모시고 희정당(熙政堂)으로 가서 수렴청정의 의식을 거행했다. 이때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해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여섯 번이나 거절한 끝에 받아들였고, 적의(翟衣)를 갖추어 입고 희정당으로 나와서 주렴을 내리고 남면을 했다.

수렴청정 절목은 바로 이날 발표되었는데, 새 절목은 주로 송나라 선인 태후(宣仁太后)의 고사와 성종대 정희 왕후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정비한 것 이었다. 사실 중국에서는 선인 태후 이전에도 한나라 여태후(呂太后),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송나라 여태후(呂太后) 등이 섭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선인 태후가 섭정을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때의 고사를 검토한 것이다.

1800년에 정리된 수렴청정 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렴하는 처소는 편전(便殿)으로 하며, 때가 되면 승정원에서 보고한다.

2) 수렴할 때 대왕대비는 주렴의 안쪽에서 동쪽에 가까운 쪽에 남쪽을 향해 앉고, 국왕은 주렴의 바깥쪽에서 서쪽에 가까운 쪽에 남쪽을 향해 앉는다.

3) 수렴할 때 주렴의 앞에서 말을 전하는 것은 대신이 담당하고 대왕대비가 직접 서무를 결재할 수도 있다. 대비와 국왕이 함께 자리한 상황에서 주사관(奏事官)이 업무를 국왕에게 아뢰면 국왕이 직접 결정하기도 하고 대비에게 묻기도 한다. 대비는 직접 결정을 하기도 하며, 신하들은 주렴의 앞에서 직접 아뢰기도 한다.

4) 한 달에 여섯 번씩 청대(請對)하며, 조참이나 상참은 관례를 따라 보고한다.

5) 대왕대비의 명령은 ‘대왕대비전왈(大王大妃傳曰)’이라 하고 국왕의 명령은 ‘전왈(傳曰)’이라 하며, 대왕대비의 명령에는 송나라에서 ‘나[予]’라고 부른 사례를 적용한다. 내외 대문의 개폐와 군대의 이동에 대해 국왕에게 보고하면, 국왕은 대왕대비에게 알린 뒤 표신(標信)이나 신전(信箭) 등을 사용한다.

6) 신하들의 소장(疏章)은 정희 왕후 때의 사례를 따라 국왕에게 올린다. 대간들의 계(啓), 각사의 계사, 지방관의 장문은 국왕에게 올린 뒤 국왕이 직접 판결하거나 대왕대비에게 알린 뒤 비답(批答)을 내린다.

7) 새해, 동지, 탄신일에 각 도(各道)에서 대왕대비에게 전문(箋文)을 올리 는 것은 국왕에게 전문을 올리는 것과 같이 하며, 각종 물품도 국왕의 사례에 준하여 거행한다.

8) 국왕이 경연을 할 때에는 대왕대비는 주렴 안쪽에 수시로 가서 듣는다.

9) 수렴청정을 알리는 고유제는 길일을 골라 사직, 종묘, 영녕전, 경모궁에서 거행한다.53)『순조실록』 권1, 순조 즉위년 7월 갑신(4일).

이 중에서 대왕대비가 국왕의 경연에 참석하는 것은 정희 왕후 때에는 하지 않았는데,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했던 것을 수용한 것이다. 정순 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경연을 활성화시키라고 명령했고, 자신이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경연 석상에서 논의된 내용을 기록해 올리라고 할 정도로 경연에 관심을 두었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고종이 즉위했을 때에도 왕실 어른의 수렴청정은 계속되었는데, 정순 왕후 때의 수렴청정 절목이 바탕이 되었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같은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은 국왕의 나이가 어리거나 국정 운영의 경험이 없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따라서 시간이 흘러 국왕이 성인이 되면 국정 운영권을 국왕에게 돌려주고 물러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애초에 수렴청정을 끝내는 시기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고,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왕실의 외척(外戚)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으므로, 국왕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시점에 대해서는 국왕이나 대왕대비의 생각이 다를 수 있었다. 또한 수렴청정을 시작할 때는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여러 차례 거절하다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수렴청정을 끝낼 때에는 국왕이나 대신들이 이를 만류하는 절차가 뒤따랐기 때문에 국왕으로서는 처신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특히 순조 이후로는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왕실 외척의 세력이 비대해져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19세기에 세도 정치(勢道政治)가 발달한 것은 잦은 수렴청정으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