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1. 구중심처 들여다보기
  • 궁 같지 않은 궁
박홍갑

왕이 일정한 장소에 정착해서 사는 곳이 궁궐인데, 별궁이나 행궁(行宮)처럼 임시로 거처하는 궁도 있긴 하였다. 서울 안에는 궁궐 아닌 궁이 여럿 있는데, 이들은 대개 별궁이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궁궐 안에서 태어나 왕자에서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순서이다. 그렇지만 어디 세상일이 원래 법칙대로 돌아가란 법이 있겠는가? 철종처럼 강화도에서 농사일이나 거들던 어린 총각이 갑자기 왕위를 물려받은 극적인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왕이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 하는데, 승천(昇天)하기 전에 물에 잠긴 용을 비유해서 나온 말이다. 이런 잠저는 대개 왕실 소유로 넘어가 필요에 따라 사용되었는데, 이를 보통 별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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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본궁
함흥 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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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
용흥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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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에는 왕위 계승과는 무관하게 살다가 뜻하지 않게 대통(大統)을 이은 행운아도 여럿 있다. 중종·인조·선조·철종·고종이 바로 그들인데, 중종이나 인조는 반정군(反正軍)의 추대를 받아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으며, 선조와 철종 그리고 고종은 왕실에서 후사(後嗣)를 잇지 못해 가까운 피붙이 중에서 추대한 임금이다. 또 세조·효종·영조와 같이 당초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왕자였지만 후에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라 당당하게 입궐한 경우도 있다. 이들이 살았던 잠저는 대개 즉위 후 별궁으로 지정되어 원묘(原廟)나 진전(眞殿)으로 관리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함흥 본궁(咸興本宮), 인조의 사저 저경궁(儲慶宮), 효종의 사저 어의궁(於義宮), 영조의 잠저 창의궁(彰義宮), 강화 도령 철종의 사저 용흥궁(龍興宮) 등이 잘 알려진 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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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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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왕이 먼 길을 행차할 때면 쉬거나 하룻밤 묵을 숙소가 필요하다. 자주 경유하는 곳이면 대개 별도의 휴식처를 마련해 두기도 하는데, 이를 행궁이라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 바로 화성 행궁(華城行宮)이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에 수원 땅에다 화성을 축조하면서 팔달산 동쪽 기슭에 576칸이나 되는 행궁을 지었으니, 행궁 치고는 규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겠다.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위해 화성으로 천도까지 계획하였으니, 행궁 규모 또한 한양 궁궐에 비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임금들이 잠시 온천을 다니거나 사냥을 위해 세웠던 행궁은 궁이라 하기에 는 초라한 건물도 많았다.

그런데 왕이 거주하였던 곳만 궁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흥선 대원군이 살던 집을 운현궁(雲峴宮)이라 불렀던 것이 단적인 예이다. 고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섭정(攝政)으로 10여 년간 나라를 통치하였던 이가 흥선 대원군이었다.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임을 부각시키려고 그의 사저를 격상시켜 운현궁이라 하였다. 한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 앞에서 밀실 정치(密室政治)와 막후 정치(幕後政治)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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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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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
경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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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사신을 접대하거나, 비빈(妃嬪)을 맞아들이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궁도 별궁으로 칭하였다. 1881년(고종 18) 안국동에 8동의 건물로 지은 안동 별궁(安洞別宮)은 순종의 혼례식 등 왕실 행사를 치르던 곳인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최근 고양시 한양 골프장 구내의 옛 목조 건물, 우이동 메리츠 화재 연수원 구내 한옥 건물, 풍문 여자 고등학교 구내의 한옥 건물 한 채가 안동 별궁에 딸려 있던 건물임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왕의 지친(至親)이지만 종묘에 모시지 못한 이를 위해 지은 사당(祠堂)도 승격하여 궁으로 불렸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를 위해 궁궐 안에 사 당을 세워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원래 영조가 사도 세자 넋을 기리기 위해 한양 동부 숭교방(崇敎坊)에다 수은묘(垂恩廟)를 세웠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올림과 동시에 창덕궁 안에다 경모궁을 지은 것이다. 결국 정조의 효심으로 궁으로 승격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도 세자 생모 영빈 이씨(映嬪李氏)의 사당인 의열묘(義烈廟)를 선희궁(宣禧宮)으로 고쳐 격을 더 높였다. 선희궁은 나중에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 등과 함께 칠궁(七宮)으로 조성되었다. 칠궁에는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사당인 대빈궁(大嬪宮), 진종(眞宗, 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 사당인 연우궁(延祐宮),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 사당인 경우궁(景祐宮)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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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坊全圖)
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坊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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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왕자나 공주 이하 격이 낮은 왕족이 사는 집을 방(房)이라 하였고, 궁과 합쳐 궁방(宮房)이란 말도 자주 쓰였다.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궁가(宮家)의 총칭이 궁방이다. 궁실은 왕과 선왕의 가족과 집안을 뜻하며, 궁가는 역대 여러 왕에서 분가한 왕자·공주의 종가를 뜻하기도 한다.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라에서 궁방전(宮房田)이라는 토지를 지급해 주었고, 조세는 면제되었다. 조선 후기 『탁지지(度支志)』와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총 68개소의 궁방이 등록되어 있을 정도니, 그에 딸린 재산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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