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퍼스트레이디, 왕후
  • 왕후가 하는 일
박홍갑

왕후를 흔히 국모라 일컫는데, 유교 국가에서는 만백성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밖으로는 사회 전체의 음덕(陰德)을 진작시키고, 안으로는 궐내 내명부(內命婦)를 통솔해야 하는 실로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리였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본 자질도 중요하지만, 엄격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보통 세자빈으로 입궁하였다가 남편이 왕위 계승을 하는 날로부터 궁궐의 안주인이 된다. 그러니 입궁한 날부터 왕후·왕대비·대왕대비 등 왕실 웃어른이나 큰 상궁에게 왕실 법도를 익히고, 국모가 지녀야 할 덕목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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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내훈(御製內訓)』
『어제내훈(御製內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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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로 즉위한 후에는 궐내 내명부 조직을 통솔하는 표본으로서, 궁궐 안 여성들에게 예법을 가르치면서 부인으로서 혹은 어머니나 며느리로서 의 역할을 다하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의 대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다. 길일(吉日)을 택해 합방(合房)하고, 임신 후에는 몸가짐을 바로 하는 태교(胎敎)를 행하고, 기타 왕실 안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합방하는 날은 경험 많은 큰 상궁이나 관상감(觀象監)에서 정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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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잠실 현판
친잠실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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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가 행하는 일상적인 의식으로는 뽕따기와 길쌈이 있었는데, 이는 여성 노동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직접 노동을 하기보다는 시늉을 하는 데 불과하였지만, 이를 몸소 실천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모든 여성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왕비가 뽕을 따서 누에를 치는 의식을 친잠례(親蠶禮)라 하였는데, 내명부와 외명부(外命婦) 여성들을 거느리고 직접 뽕밭으로 가서 뽕을 땄다.

궁궐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이를 내잠실(內蠶室)이라 하였는데, 이곳에서 친잠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영조대에 편찬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는 친잠례를 설행(設行)하는 절차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 왕이 직접 농사일을 하는 의식인 친경례와 함께 만물이 소생하는 3월에 실시하였다.68)신명호, 『궁중 문화-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돌베개, 2002. 그리고 궁궐 안에 직조기(織造機)를 들여 몸소 길쌈하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농경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여성 노동의 중요성을 온 세상에 보여 주는 것도 왕후가 행하는 큰 임무 중에 하나였다.

오늘날도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듯이,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훨씬 오래 살았다. 특히 조선시대에서는 단명한 임금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궁궐 안에는 교태전을 비워 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앉은 과부가 많았다. 이들은 대비전(大妃殿)으로 물러나 조용히 지내야 했지만, 가끔 정사를 보지 못할 정도의 어린 아들이나 손자가 왕위를 이을 때,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임금이 성년이 되는 20세 전후까지는 드리웠던 발을 치우지 않았다. 13살 어린 나이에 성종이 등극하자 정희 대비(貞熹大妃)가 7년간 수렴청정을 한 것을 비롯하여, 명종, 선조, 숙종, 순조, 현종 즉위 때에도 발을 드리우고 대비가 섭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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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어제잠직도(肅宗御製蠶織圖)
숙종어제잠직도(肅宗御製蠶織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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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왕비 임무가 실로 막중하였기에 정략적인 차원에서 입궁하는 경우도 많았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西人)은 권력을 자자손손 유지하기 위해 ‘국혼(國婚)’을 놓치지 마라’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을 정도였다. 왕비를 배출하는 가문은 대개 당대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다. 왕실과 사돈을 맺으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더 큰 명문거족으로 발돋움한 문중도 얼마나 많았던가?

조선 왕조 500년간 왕비 배출 상황을 살펴보면, 특정한 몇몇 가문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다름 아닌 권력의 집중이다. 그러나 권력을 쫓기 위한 국혼이 자칫 멸문(滅門)의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불같은 성 정을 지닌 태종이 처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을 멸문 지경에 빠뜨렸고, 세조가 임금이 된 후 단종의 처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었으며, 연산군과 중종에게 각각 딸을 보냈던 거창 신씨(居昌愼氏) 가문은 이중으로 화를 입었다. 위험 부담이 큰 장사일수록 이문이 많다는 명제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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