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왕의 여인들, 후궁
  • 스산한 칠궁이여!
박홍갑

청와대 앞 분수대를 돌아 세검정(洗劍亭) 방향으로 가다보면 커다란 궁문 하나가 나온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번지, 산비탈에 자리한 이곳이 이른바 칠궁(七宮)이다. 칠궁이란 일곱 명을 모셨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 왕의 어머니였건만 후궁(後宮)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죽은 후 위패를 종묘에 안치할 수 없었던 일곱 명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다. 그 러니 한 서린 일곱 여인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세워 준 사당이 바로 칠궁인 것이다.

이곳을 처음부터 칠궁이라 부른 것은 아니어서, 본래 이름은 육상궁(毓祥宮)이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시대를 열었던 영조는 궁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다. 왕자를 생산한 무수리 최씨는 점차 품계가 높아져 종1품 숙빈(淑嬪)에까지 봉해졌지만,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는 없었다.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이복동생이었던 연잉군(延礽君)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영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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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
육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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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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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이 남달랐던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어머니를 위해 궁궐 후원에다 사당을 지어 매일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20년 후 사당을 승격시켜 육상궁이란 묘호(廟號)를 지어 올렸다. 칠궁 안 중앙부에 위치한 냉천정(冷泉亭)은 영조가 어머니 제사를 위해 몸을 가다듬던 곳이다. 건물 뒤편에서 퐁퐁 솟아나는 냉천 찬물로 영조 이래 왕들이 갈증을 적셨고, 외로운 영혼들도 찬물 한 바가지로 설움을 이겨 내던 한 서린 곳이다.

국운이 기울어진 1908년(융희 2) 숙빈 최씨와 비슷한 처지의 사당 다섯 곳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제전(祭典)을 간소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리하여 이름을 육궁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英親王) 생모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사당을 이곳에 옮겨 칠궁이 되었다. 칠궁에 합설(合設)된 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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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에 걸었던 현판
육상궁에 걸었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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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육상궁 : 숙종 후궁이자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

② 저경궁(儲慶宮) : 선조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인 인빈 김씨

③ 대빈궁(大嬪宮) : 숙종 후궁이며 경종(영조의 이복형)의 생모인 희빈 장씨

④ 연우궁(延祐宮) : 영조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 현재 육상궁에 합사(合祀)

⑤ 선희궁(宣禧宮) : 영조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莊祖, 사도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현재 경우궁에 합사

⑥ 경우궁(景祐宮) : 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⑦ 덕안궁(德安宮) : 고종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

이렇듯 한때는 왕의 여자였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지존의 자리에 올랐건만, 후궁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죽어 스산한 바람만 날렸을 칠 궁을 지켰던 것이다. 이 궁문은 1960년대 말부터 굳게 잠겨 버렸다. 1·21 청와대 무장 공비 습격 사건 이후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30년도 더 지난 2001년 말부터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기 시작하였건만, 외로운 영혼들의 목을 적셔 주던 냉천은 지금 말라 있다.

의친왕(義親王)의 다섯째 아들 이수길 씨와 결혼하여 황가(皇家)의 며느리가 된 김신덕 여사는 중세와 현대의 고단한 역사를 짊어지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1960년부터 1984년까지 칠궁에서 살았다. 제5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불법 거주자로 몰려 강제 퇴거당한 뒤 서울시에서 마련해 준 시영 아파트로 이사하는 곤욕을 치렀다. 칠궁에 제사만이라도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아흔 넘은 노구를 이끌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김신덕 여사를 바라볼 때, 우리 역사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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