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왕의 여인들, 후궁
  • 후궁이란
박홍갑

후궁의 원래 뜻은 중국 천자가 거처하는 궁궐 뒤쪽의 깊숙한 곳을 의미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 금단(禁斷)의 장소였던 하렘(harem)과 유사하다. 중국 천자가 살던 궁성은 안팎의 구분이 확연하여, 외조는 백관 접견과 정치 주재 및 의식을 행하는 장소인 반면 내정은 황후 이하 부녀자나 미성년 자식과 함께 개인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곳이다. 이 내정을 후궁이라 불렀는데, 그 구성원의 다수가 여자였기에 궁중 여자를 그냥 후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임금의 첩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처첩의 수가 곧 신분의 상징이었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천자는 1명의 황후 외에 3부인, 9빈, 27세부(世婦), 81여어(女御) 등 모두 121명의 처첩을 둘 수 있었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삼천 궁녀는 백낙천(白樂天)이 당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읊은 ‘장한가(長恨歌)’에 나오지만, 그 수가 정말 3,000명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많은 후궁을 거느려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커다란 대의명분이었으니, 싫어할 남자가 또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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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헌 황귀비(純獻皇貴妃)
순헌 황귀비(純獻皇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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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후궁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비교적 자세하다. 왕의 적처를 왕후, 후궁을 부인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중국 천자와 대등한 호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궁 벼슬인 귀비(貴妃)·숙비(淑妃)·덕비(德妃)·현비(賢妃)의 명칭과 함께 정1품의 품계를 주었는데, 정종 이후 궁주(宮主)·원주(院主)·옹주(翁主) 등의 이름으로 개칭하는 등 변화가 빈번하였다. 고려 태조는 혼인 정책으로 제1 왕후 외에 제6비까지를 왕후라 불렀고, 나머지 부인(夫人)이라 칭한 후궁만도 20명이 넘었을 정도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제후국의 예를 갖추어 왕의 적처를 후라 하지 않고 비라 칭하였다. 그리고 후궁에게는 내명부 벼슬을 주어, 종4품 숙원(淑媛)·정4품 소원(昭媛)·종3품 숙용(淑容)·정3품 소용(昭容)·종2품 숙의(淑儀)·정2품 소의(昭儀)·종1품 귀인(貴人)·정1품 빈(嬪)으로 세분하였다. 1897년(광무 1)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황제국이 되자, 후궁 명칭 또한 귀비·귀빈·귀인 등 중국과 동급 호칭으로 격상되었는데, 이를 3부인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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