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왕의 여인들, 후궁
  • 후궁이 하는 일
박홍갑

조선시대에 왕의 여자들에 대한 품계나 직분을 규모 있게 정한 것은 1428년(세종 10)경이었다. 이때 이들을 크게 후궁과 궁녀로 양분하여 품계에 따라 고유 직무를 부여하였다. 정1품 빈과 귀인은 왕비를 도와 부인의 예를 의논하며, 정2품 소의와 숙의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게 하였고, 정3품 소용과 숙용은 제사 지내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 정4품 소원과 숙원은 왕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하고,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바치게 한 것이 그것이다.76)『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경인(8일). 이것이 근간이 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 내명부 조항으로 완비되었던 것이다.

후궁은 종친 내연(宗親內宴)이 있으면 왕비를 따라 참석하였고, 왕비 간택 자리도 여러 종친 부인이나 공주와 함께 참석할 정도였다. 때로는 왕비 소생을 길러 주기도 하며, 왕비 대신 친잠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정의 궁주는 명나라 후궁 권파파(權婆婆, 고려 출신)와 서신이나 선물을 주고받으며 교제하였으니, 오늘날 퍼스트레이디의 공식적인 행사와 비공식적인 행사에 준하는 활동까지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출궁(出宮)당하거나 죄를 받을 확률이 많은 것도 후궁이었다. 태종은 숙공 궁주(淑恭宮主) 김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적이 있는데, 그녀 아버지 김점(金漸)의 죄를 국문할 때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린 후궁의 사소한 청이라도 과감히 물리친 세종 역시 공사를 엄격하고도 분명하게 하겠다는 의지 굳은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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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유인(淑嬪鍮印)
숙빈유인(淑嬪鍮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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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은 오직 왕에게 달린 것이긴 하지만, 총애와 공로에 따라 다양한 예우를 받았다. 봉작과 품계의 승격은 물론이고, 태종이 후궁 정의 궁주에게 연못까지 파준 사실 하나만 봐도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 정도의 은전은 궁 밖의 가족과 족친에게도 당연히 주어지기도 하였다.

흔히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산다.”는 말을 쓰곤 한다. 더군다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사랑이야 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려는 궁중 여인 사이의 기 싸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였다. 더 나아가 총애를 바탕으로 권세를 휘두른 후궁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 때 장녹수, 광해군 때 김개시(金介屎), 숙종 때 장 희빈(張禧嬪) 같은 이가 ‘왕의 여자’로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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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묘비
희빈 장씨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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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인들도 남근목(男根木)을 지니고 있었을까? 궁녀의 처소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남근목은 임금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비방이었다고도 한다. 남자의 심벌을 나무로 깎아 이불장 속에다 꼭꼭 숨겼던 것이 꽤나 유행하였을 것 같다. 궁중 여인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비방을 통해서라도 임금과의 사랑을 꿈꾸었을 테니까.

특히 왕비와 후궁, 혹은 후궁들 간의 씨앗 싸움은 왕조가 지속되는 한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자식이 지존의 자리를 차지하는 가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 왕후(文定王后)와 경빈 박씨(敬嬪朴氏) 사이의 한판 대결은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일로 기록되기도 한다.

후궁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시던 왕이 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왕이 죽고 나면 헌신짝 같은 운명으로 전락하는 것이 바로 후궁이었다. 만약 왕자를 생산하여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면 죽어서까지 호강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온갖 눈칫밥을 먹으며 수절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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