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2. 나라님의 여인들
  • 왕의 여인들, 후궁
  • 정업원을 아시나요
박홍갑

왕이 죽고 나면 그에 딸린 후궁은 당연히 출궁하였다. 오직 왕을 위한 여자였기에 왕이 죽는 순간부터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으니, 일종의 용도 폐 기인 셈이다. 같은 왕의 여자라 해도 왕비와 차이가 나는 점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왕의 생사 여부에 상관없이 궁궐에서 지낼 수 있는 왕비는 죽어서도 종묘에 모셔지지만, 후궁은 궁궐에서 나와 홀로 지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왕비가 죽으면 국상(國喪)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성된 무덤은 후세에까지 능(陵)으로 불리지만, 후궁의 무덤은 단지 묘(墓)라고 불릴 뿐이다.

자식을 낳은 후궁이야 그들과 함께 살 수도 있었겠지만, 자식도 없이 갑자기 출궁된 후궁은 대개 머리를 깎았다. 수절하면서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한때 지엄한 주상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후궁이 여생을 보내는 절간 같은 곳, 그곳이 바로 정업원(淨業院)이었다.

정업원은 고려시대 기록에도 간간히 보이는데, 조선에 들어와서는 공민왕 후궁이었던 혜화 궁주(惠和宮主, 이제현의 딸)가 비구니가 되어 정업원에 머물다 죽었다는 1408년(태종 8)의 기록을77)『태종실록』 권15, 태종 8년 2월 임오(3일). 필두로 『조선 왕조 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정업원 주지는 대개 명망 있던 후궁이 이어가곤 하였다. 그러니 왕실 불교를 상징하는 존재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유학자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정업원이 세종 때 일시 혁파되었다가 불자(佛者)였던 세조가 다시 설립하였고 연산군 때 들어와 또 혁파되는 등 부침이 심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런 사정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중종은 정업원 자리에다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유교 정치의 이념을 제공하는 곳으로 삼기도 하였는데, 시끄럽고 번잡하다는 이유로 후에 독서당을 동호(東湖)로 옮겼다. 오늘날 금호동 독서당길이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전횡을 일삼던 문정 왕후가 강경하게 밀어붙인 끝에 정업원은 또 다시 설립되었다. 옛 정업원 터에다 인수궁(仁壽宮)을 지어 후궁들의 별처(別處)로 삼는다는 명목이었다.78)『명종실록』 권4, 명종 1년 7월 신사(26일) ; 『명종실록』 권9, 명종 4년 12월 병진(21일).

선조 때에는 여러 차례 신하들의 혁파 건의가 있었건만 계속 존속시켰고, 광해군 때 총애 받던 특별 상궁 김개시가 인조반정 소식을 들은 곳도 바 로 정업원이었다.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던 그녀는 반정 소식을 듣고 민가로 숨어들었다가 결국 잡혀 살해되었는데,79)『광해군일기』 권187, 광해군 15년 3월 계묘(13일). 이를 계기로 정업원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지상 과제로 삼은 인조대의 서인 정권이 정업원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왕족에게 시집갔다가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여인들도 대개는 정업원 승려가 되었다. 그러니 왕과 왕족을 모시던 여성들의 훌륭한 안식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한때 노비와 전답을 지급하는 등 국가적 보호를 받기도 하였으나, 결국 정업원은 혁파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정업원이 폐지된 조선 후기에는 도성 안 두 곳에다 여승방(女僧房)을 두었으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여기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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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구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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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업원은 궁성 동북쪽에 있다 하였는데,80)『선조수정실록』 권8, 선조 7년 4월 을사(1일). 응봉(膺峰) 아래 창경궁 서쪽, 지금의 중앙 중학교가 있는 곳이라 한다. 그런데 종로구 숭인동 산 3번지에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보존되어 있다. 정업원 옛터라 하여 영조가 친필로 비문을 쓰고 이곳에다 세웠기 때문이다.81)『영조실록』 권117, 영조 47년 8월 병신(28일). 도성 안이 아니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아래인데(지하철 6호선 창신역 동쪽 청룡사 인근), 단종의 비 송씨가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그리며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동쪽을 향해 망왕(亡王)을 추모하였다는 곳이 바로 동망봉이다. 정업원이 동대문 밖에 있었다는 전설 때문에 단종 비 송씨를 추모하여 영조가 현 위치에 세웠으나,82)서울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서울 육백년사』 문화 사적편, 1987. 이는 영조의 착각이자 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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