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3. 궁녀
  • 궁녀의 굴레, 내명부
박홍갑

궁녀란 내명부에서 총괄되는 정5품 상궁 이하 종9품까지의 궁중 여관(女官)들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명부는 크게 두 개의 층으로 구성 되어 있다. 위로는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 왕의 후궁층(後宮層)인 내관 규정이 있고, 그 아래 잡역 궁인을 부리는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의 궁관층(宮官層)으로 나뉘어 있었다.85)『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내명부(內命婦).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녀란 상궁 이하 궁관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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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과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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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명부 품계도 일반 관원처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개의 품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후궁이요, 정5품에서 종9품까지는 각 궁에 소속되어 뒷수발을 담당하는 시녀들이다. 궁녀 중에서도 왕의 승은을 입는다면, 언제든지 후궁으로 승격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초기 수십 명에 불과하던 궁녀는 점차 증가하였다. 성종 때 100명 정도를 넘긴 후86)『성종실록』 권3, 성종 1년 2월 을묘(6일). 영조 때에는 대전에서부터 세손 빈궁 및 각전각궁(各殿各宮)의 궁녀 모두를 합해 480명 정도였다고 하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영조 연간(1724∼1776)에 684명의 궁녀가 있었다고도 하였다.87)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24, 경사문(經史門), 환관궁녀(宦官宮女).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400∼600명 수준의 궁녀가 존재하였던 것 같다. 왕이 거처하는 대전 외에도 왕대비,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궁과 공주궁, 그리고 후궁과 각 별궁에도 각기 따로 궁녀를 두었기 때문에 왕실을 구성하는 인원수에 비례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체 궁녀 수는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연산군이 행차할 때는 1,000명이 넘는 궁녀를 동원하여 시중들게 할 정도였다.88)『연산군일기』 권63, 연산군 12년 7월 을미(18일).

궁 안에서 시중드는 궁녀는 조선 이전에도 있었지만, 관료 조직 속에 포함시킨 것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이다. 태조 때 정도전 등이 요청하여 명칭과 등급을 매긴 내명부를 제정하였다.89)『태조실록』 권11, 태조 6년 3월 무진(15일). 그리고 태조 때부터 “여관(女官)에게 월급을 지급하였다.”는 기록이 있어,90)『태조실록』 권12, 태조 6년 12월 갑진(26일) ; 『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6월 을사(1일).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좀 더 다양한 궁녀 체제를 확립해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그 체계를 더욱 다듬어 갔는데, 특히 1428년(세종 10)은 조선시대 궁녀 조직의 틀이 거의 완성되는 시기였다.91)『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경인(8일). 앞서 살펴본 『경국대전』 내명부 규정과 거의 동일한 품계와 명칭이 이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내전의 잡일을 맡아 보던 9품직의 궁녀 규정까지는 없었는데, 그 이후에 추가되어 『경국대전』에 오르게 되었다. 즉, 신설된 9품의 내명부 직명을 보면,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5음계(五音階) 위에 변치(變徵)·변궁(變宮) 2음계를 더하여 모두 7음계로 구성하였는데, 일반 관료 조직의 9품 관직이 이 시기에 대거 만들어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표 ‘조선시대 궁녀의 종류와 품계’를 보면 궁녀라고 다 같은 궁녀가 아님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품계가 다르고 관직 명칭이 각각 다르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맡은 일 또한 매우 세분되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시에는 상궁과 나인으로만 구분하였다. 우두머리인 상궁을 제외한 상의 이하 내명부 궁녀를 통상 나인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표> 조선시대 궁녀의 종류와 품계
품계 명칭 맡은 일
정5품 상궁(尙宮) 중궁(中宮)을 인도하는 일을 총책임
상의(尙儀)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책임
종5품 상복(尙服) 의복, 수 무늬, 채장(采章) 등을 책임
상식(尙食) 반찬 등 음식 공급을 책임
정6품 상침(尙寢) 왕이 입고 먹는 일을 진어(進御)하는 일을 총괄
상공(尙功) 여공(女功)의 정과(程課)를 총괄
종6품 상정(尙正) 궁녀 품행과 직무 단속을 관장
상기(尙記) 궁내의 문서와 장부 출입을 관장
정7품 전빈(典賓) 빈객 접대, 연회(宴會)·상사(賞賜)를 담당
전의(典衣) 의복과 머리에 꽂는 수식(首飾)을 담당
전선(典膳) 삶고 졸여 간을 맞추는 반찬을 담당
종7품 전설(典設) 장막, 왕골자리, 청소, 물건 장설(張設)을 담당
전제(典製) 의복의 재봉에 관한 일을 담당
전언(典言) 백성에게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 담당
정8품 전찬(典贊 빈객 접대, 연식(宴食) 업무를 보조
전식(典飾) 세수, 화장, 머리 빗는 일을 담당
전약(典藥) 의약 처방과 시약(施藥)을 담당
종8품 전등(典燈) 등불과 촛불에 관한 일 담당
전채(典彩) 비단, 모시 등 직물을 담당
전정(典正) 상정(尙正) 업무를 보조
정9품 주궁(奏宮) 내전의 잡일을 담당(이하 동일)
주상(奏商)
주각(奏角)
종9품 주변치(奏變徵)
주치(奏徵)
주우(奏羽)
주변궁(奏變宮)
✽『경국대전』 내명부조에 의거 정리함.

그렇다면 내명부 조직을 왜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세분하였는지 궁금해진다. 이렇듯 복잡한 품계와 조직은 위계를 나타내 주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궁중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례 행사(儀禮行事)에서는 복잡한 명칭과 차서(次序)대로 상징적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례가 끝나면, 그것 역시 따라 끝나 버린다. 그러니 평시에는 상궁, 나인으로만 호칭되었을 뿐이고, 나인 사회에서는 고참과 신참만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궁녀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상궁이 되려면 25년에서 35년이 걸렸다. 임금이나 왕비 옆에서 시중드는 지밀나인(至密內人)은 25년이면 상궁이 되지만, 침방이나 수방(繡房)의 나인, 수라간(水剌間)이나 세답방(洗踏房)의 나인은 35년 정도 일하여야 가능하였다.92)『여관 제도 연혁(女官制度沿革)』 장서각 도서 2-2032. 이렇듯 수십 년간 궁중 일을 아무 탈 없이 소화해 내야만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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