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3. 궁녀
  • 엇갈린 운명, 승은 궁녀와 쫓겨난 궁녀
박홍갑

조선 중기 한문 소설인 『운영전(雲英傳)』은 안평 대군(安平大君) 별궁에 소속된 궁녀 운영과 소년 선비 김 진사의 비극적 사랑을 담은 이야기이다. 담장 밖의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운명이기에 더욱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안평 대군이 외간 사내와 정을 통한 운영의 죄를 다스리는 자리에서 은섬이란 궁녀가 친구 운영을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남녀의 정욕은 음양의 이치에서 받은 것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깊은 궁에 갇히자 외로운 몸이 되어 꽃을 봐도 눈물이 눈을 가리고, 달을 대하여도 넋을 잃어, 매화나무에 앉은 꾀꼬리로 하여금 짝을 지어 날지 못하게 합니다.

궁녀이기 이전에 한 여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정욕의 해소는 궁녀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큰 숙제였다.

『조선 왕조 실록』에는 죄를 지은 궁녀의 처벌 기록이 자주 나온다. 궁녀가 실록에 오를 기회라면 큰 죄를 짓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그들의 생활이란 게 은밀하게 가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궁녀가 범할 큰 죄란 지엄한 금기 사항을 어기는 일이었다. 임금 외의 사내를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첫 번째 금기 사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궁중 생활이란 게 의외로 은밀한 곳이 많다. 궁녀와 내시가 들락거리는 장소는 물론이고, 액정서(掖庭署) 소속 별감(別監)의 근무지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으슥한 공간이었다. 단종 때 별감과 궁녀가 단체로 교제를 하다가 적발된 사건으로 미루어 보면101)『단종실록』 권6, 단종 1년 5월 갑자(8일). 쉽게 짐작이 간다. 궁궐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종친과 궁녀 간의 스캔들도 자주 보이는 편이다. 궁녀는 관례를 올린 후에 방을 꾸며 마음 맞는 궁녀나 하녀와 같이 생활하게 되는데, 외로운 처지의 꽃다운 나이가 많아 동성애(同姓愛)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할 정도였다. 궁녀들의 동성애를 대식(對食)이라 하였는데, 서로의 투기도 꽤 심하게 전개되곤 하였다.102)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經史編) 5, 논사류(論史類) 1, 한나라 궁중의 대식에 대한 변증설, 민족 문화 추진회, 1989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는 간통한 궁녀와 사내 모두 즉시 참수(斬 首)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 사형 방법 가운데 목을 베는 참수는 극형(極刑)에 속하는 것이니,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 운영과 같은 죄를 지어 처형당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죽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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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별감과 무예별감
시위별감과 무예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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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일반인의 범죄는 형조(刑曹)나 의금부(義禁府)에서 담당하지만, 궁녀가 죄를 지으면 좀 다르게 처리하였다. 자잘한 죄는 각 처소의 상전(上典)이 직접 조사하고 처벌하였다. 그런 수준을 넘어서면 형조도 의금부도 아닌 환관의 몫이다. 내수사 감옥에 은밀히 가두어 놓고 조사하고 처벌하였던 것이다. 경과와 결과는 국왕에게만 보고됨은 물론이다. 궁중 안의 내밀한 사정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1748년(영조 24)에는 혜영(惠永)이란 궁녀를 단천에 귀양 보냈지만,103)『영조실록』 권68, 영조 24년 10월 무술(17일).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환관이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반역(叛逆)이나 대역죄(大逆罪)에 연루된 궁녀는 왕이 친국(親鞫)하였지만, 이때에는 어쩔 수 없이 공개적으로 치죄(治罪)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옥사(獄事) 중에 궁녀가 끼지 않은 옥사는 없다고 단정해도 좋을 정도로 옥사와 궁녀의 함수 관계는 컸다. 왕실 내부 사정에 그만큼 훤하기 때문이다. 또 각 처소마다 벌이는 권력 투쟁에 늘 앞잡이로 동원되던 것이 궁녀였다. 가령 궁녀를 시켜 음식에 독약 을 타는 것을 소급수(小急手)라 하는데, 이런 식의 이름도 원인도 모를 옥사에 연루되어 죽어 나간 궁녀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수백 궁녀 중에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하니 그들이야말로 왕권의 그늘에 소리 없이 피고 지고 간 희생의 꽃들임에 틀림없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김개시나 상침 신씨(尙寢辛氏)는 아이를 낳지 못한 승은상궁이었다. 고종 때 의친왕을 낳은 장씨, 완왕(完王) 생모 영보당(永保堂) 이씨, 육(堉)의 생모 이씨, 우(堣)의 생모 정씨 등도 승은 직후 상궁이 됐다가 나중에 후궁 반열 2인자인 종1품 귀인으로 올라갔던 인물이다. 이들이야 말로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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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 차림의 궁녀들
상복 차림의 궁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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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는 대부분 승은을 입지 못하였다. 하여 궁녀는 오로지 모시던 주인 처소에 매달려 한평생을 보내야 했고, 모시던 주인이 죽으면 부모와 동일하게 삼년상을 치러야 했다. 왕과 왕비가 죽었을 때는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 사가의 부모와 동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왕비의 친정아버지 상을 당 해도 왕비를 따라 상복을 입었다. 모시던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상을 치른 후에 궁 밖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사도 세자를 모시던 궁녀 이씨는 주인이 뒤주 속에서 죽자 출궁되어 숨어서 어렵게 혼자 살았다. 정조가 우연히 아버지를 위한 수절 궁녀였음을 알고는 수칙(守則)이란 작위와 정렬(貞烈)이란 칭호를 내렸고, 또 그가 살고 있는 곳에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달아주는 포상(褒賞)의 은전을 내렸다.104)『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7월 기축(16일).

또한 나이가 많거나 질병으로 더 이상 궁녀 생활이 어려워도 출궁이 허락되었다. 병이 들면 피병(避病)을 위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 질병가(疾病家)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에서 일단 요양한 후 완치되면 다시 입궁하였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가로 가야 했다.

왕족 외에는 궁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는 지엄한 법도 때문에 궁녀는 죽기 전에 출궁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임진왜란 후 창덕궁을 정전으로 썼을 때는 뒷문인 요금문(曜金門)을 통해 대궐을 빠져나와야 하였다. 출궁된 궁녀는 끼리끼리 모여 살았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 수국사 인근에 ‘궁말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궁녀가 모여 거주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105)박상진, 『내시와 궁녀』, 가람 기획, 2005. 인근에는 궁녀의 무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도 특수한 상황으로 궁녀가 출궁된 경우도 있었다. 세종 때 벼락이 떨어져 궁녀 하나가 죽자, 이를 안타까이 여겨 45명이나 되는 궁녀를 궁 밖으로 내보냈다.106)『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 7월 기미(12일). 영조 때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궁녀 때문에 30명을 대궐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107)『영조실록』 권106, 영조 41년 8월 신해(8일). 이렇듯 특수한 상황이 벌어질 때면 궁녀들을 대거 출궁시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자연재해가 심할 때도 가끔 수십 명의 궁녀를 방출하곤 하였다.108)『숙종실록』 권16, 숙종 11년 2월 기미(29일) ; 『영조실록』 권72, 영조 26년 9월 임인(3일) ; 『영조실록』 권80, 영조 29년 11월 을축(14일). 자연재해가 곧 궁녀들이 품은 원한 때문에 발생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한번 궁녀가 되면 죽을 때까지 궁녀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야 했다. 설사 출궁되었다 할지라도, 조선조 여 인들이 죽은 후까지도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하듯이, 궁녀들 역시 궁궐만 바라보며 수절을 강요당하였다. 궁궐과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현종 때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여성 인권 문제 차원에서 궁녀의 결혼 문제를 꺼냈지만, 냉랭한 임금의 대답만 들어야 할 정도였다.109)『현종실록』 권5, 현종 3년 4월 을사(2일).

그러나 궁녀는 여성의 정치·사회적 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전통 사회에서 맡은 분야의 전문인이자 지식인이었고, 궁궐의 음지에서 묵묵히 궁중 문화를 꽃피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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