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4. 내시
  • 내시 제도 변천사
박홍갑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내시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통일 신라의 제도가 고려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일정한 벼슬이나 녹봉도 없이 심부름을 하거나 소제(掃除)를 하는 정도의 일을 맡았는데, 예종대에 오면서 점차 임무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정치에 관여하는 것만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 후 인종대에 들어와 환관이 수적으로 크게 늘어났고, 액정원이란 관청에 소속되어 관직을 제수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의종 때부터 환관이 내시원 내시로 진출한 것을 계기로 환관의 활동이 더욱 크게 증가하였다. 내시원은 임금의 경호를 맡은 일종의 군사 기구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정함(鄭諴)이라는 환관이 내시직에 진출하면서 어린 태자 의종을 보살폈다. 그는 의종이 임금이 되자 왕권 강화에도 일조하는 등 큰 힘을 발휘하여 권력이 재상(宰相)을 능가할 정도였다.

또한 고려 말에는 원나라와의 외교에서 본국 출신 환관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충렬왕 때는 환관을 군(君)으로 봉한 예도 생겨났다. 오랫동안 원나라에 체류하였던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 환관과 교류가 많아져 사사로운 청까지 주고받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옛 제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고자 놈들이 나라를 멸시한다거나, 개처럼 원나라 황제에게 참소하여 고려를 모해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한탄까지 난무하기에 이르렀다. 백안독고사(伯顔獨古思), 방신우(方臣祐), 이대순(李大順), 우산절(禹山節), 이삼진(李三眞), 고용보(高龍普)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리하여 『고려사』 「열전」에 환자전(宦者傳)을 따로 설정하여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였던 것도111)『고려사』 권122, 열전(列傳)35, 환자(宦者). 그 때문이었다.

무신 정변 이후 환관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지만, 관직 진출은 전보다 많아졌다. 그리고 원 간섭기에는 궁중 잡역에 종사하는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왕명 출납까지 담당하는 등 환관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특히 1356년(공민왕 5)에는 환관의 독자적 관부인 내시부가 설립되어112)『고려사』 권77, 지(志)31, 백관지(百官志)2, 내시부(內侍府). 도를 지나칠 정도로 국왕의 총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환관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신진 사대부들이 내시부를 폐지하려 하였지만, 환관의 반대로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었다.

아무튼 왕조 교체 과정에서 내시는 궁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구한 이가 김사행(金師幸, ?∼1398)이었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내시가 되어 원나라 황실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 이성계를 만나 내시의 우상으로 성장하였다. 이성계를 등에 업은 그의 교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나쳐 궁 안에서조차 가마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횡포를 부렸다. 김사행 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113)『태조실록』 권15, 태조 7년 9월 을해(3일). 아무튼 그가 있었기에 조선의 내시 제도가 정착될 수 있었다.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고려 말의 상황을 몸소 체험하였기에 기회 닿는 대로 내시부 개혁과 환관 억제 명분을 내세웠지만, 국왕 입장에서 내시는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114)『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7월 기해(20일) ; 『태조실록』 권2, 태조 원년 9월 기해(21일). 궁궐 안에 득실거리는 여성을 어떻게든 보호하여야 했고, 개인적으로도 수족같이 부리고 의지할 곳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후 문무백관의 제도를 새로 정할 때 문반과 무반 등 양반이 차지하는 관직과는 별도로 내시부를 만들었다. 이는 내시에게 궁문이나 지키고 소제나 하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정치에 참견하여 밤 놔라 대추 놔라 식으로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미였다. 양반이 차지할 수 있는 관직과는 별개로 기술관 직렬(職列), 내시 직렬, 종친 직렬들을 따로 마련한 것이 조선조 관료제의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는 중인이나 내시가 양반이 차지하는 관직을 넘보지 못하도록 그 길을 원천 봉쇄한 측면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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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세종 때를 거치면서 녹봉 지출이 많은, 품계 높은 내시직을 폐지하는 대신에 하위직을 늘려 내시의 숫자가 전체적으로 좀 늘었다. 그런 후 세조가 집권하자 왕권 강화와 제도 정비 차원에서 내시부 인원을 적절하게 줄였으며, 성종 때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조선의 내시부 체제가 완연하게 틀을 갖추었다. 이에 의하면 조선시대 내시는 모두 140명 내외를 둘 수 있었다.

그 후 연산군대에 161명으로 늘어났고, 조선 후기 인조대에도 그 정도 숫자가 유지된 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까지는 대략 160여 명의 내시를 두었 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내시의 실제 숫자는 300명에서 400명 정도로 추산되기도 한다. 이는 『성호사설』에서 영조가 통치하던 시절에 내시가 335명이었다고115)이익, 『성호사설』 권24, 경사문, 환관궁녀. 한 것을 토대로 유추한 숫자이다.

근세에 들어와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몇 개의 유사한 관서를 합하여 내시사(內侍司)로 개편하면서, 대전 소속 내시 50명, 대비전 10명, 중궁전 10명, 세자궁 20명, 세자빈궁 8명, 세손궁 15명, 세손빈궁 6명 등 도합 120명의 내시를 두었으나,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내시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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