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 4. 내시
  • 내시가 하는 일
박홍갑

고려 중기까지 내시는 수가 많지 않기도 하였지만, 하는 일 또한 내궁(內宮)에서 왕이나 비빈의 심부름을 하거나 내궁에 설치된 옥(獄)을 관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정치에 관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과감하게 내시부를 독립시켜 운영함으로써 정치 관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한 내시 조직과 그들의 임무를 보면 그 구상과 의지가 잘 드러난다. 즉 내시의 임무가 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지키는 일, 소제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122)『경국대전』 이전, 내시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정2품의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가 내시부의 수장(首長)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표 ‘조선시대 내시 조직과 임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종2품 상선이 내시부의 최고 관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시부에는 모두 59개의 관직이 설치되어 있는데, 140명의 내시들이 이들 관직을 돌아가면서 맡았다. 상위직으로 올라가면 쉬지 않고 계속 근무하게 되지만, 하위직으로 갈수록 1년에 네 번씩 교대로 돌아가며 쉬어야 한다.

쉬는 동안 녹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형태로 운영되는 관직을 체아직(遞兒職)이라 하는데, 조선시대 양반이 진출하는 문반직에는 체아직이 없지만 서반 군직(西班軍職), 중인이 진출하는 기술직, 내시부는 체아직으로 운영하였다. 한정된 관직으로 많은 인원에게 관직을 주는 일종의 편법 운영이다.

궁중 내의 음식 품질을 검사하고 감독하는 일은 종2품 상선과 정3품 상 온, 정3품 상다 등이 책임지는 업무였다. 대내(大內)의 물선(物膳), 술, 차, 기타 모든 식음료를 일일이 검사하고 감독하였다. 내시부에는 각 전마다 배치된 설리(薛里)가 있었는데, 몽고어로 ‘조(助)’라는 뜻이다. 예컨대 대전과 왕비전에는 종4품 상책이, 왕비전 주방과 문소전에는 정5품 상고가, 세자궁에는 종5품 상탕이 각각 설리를 맡았고, 이들 설리가 사옹원(司饔院) 직원과 함께 계절에 맞는 음식을 올리는 책임을 졌다. 이에 대한 감독은 도설리(都薛里)가 전담하는데, 내시부를 관장하는 상선이 도설리를 겸하였다. 그러하니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상(進上) 물품 관리도 도설리가 맡는 때가 많았다.

<표> 조선시대 내시 조직과 임무
품계 관직명 맡은 일 임 무
종2품 상선(尙膳) 2 식찬(食饌) 만드는 일을 책임
정3품 당상 상온(尙醞) 1 술 빚는 일을 관장
정3품 당하 상다(尙茶) 1 다과(茶果) 준비하는 일을 관장
종3품 상약(尙藥) 2 의약 처방과 시약(施藥)에 관한 일을 맡음
정4품 상전(尙傳) 2 궁중 전명(傳命)에 관한 일을 맡음
종4품 상책(尙冊) 3 서책에 관한 일을 맡음
정5품 상호(尙弧) 4 목궁(木弓)을 관리하는 일을 맡음
종5품 상탕(尙帑) 4 궁전의 재화(財貨)를 관리
정6품 상세(尙洗) 4 장기(掌器) 등촉방(燈燭房) 주방(酒房) 일
종6품 상촉(尙燭) 4 등촉(燈燭)에 관한 일을 맡음
정7품 상훤(尙烜) 4 취화(取火)의 임무를 맡음
종7품 상설(尙設) 6 위장(幃帳)·인석(茵席)·쇄소(灑掃)·장설(張設)
정8품 상제(尙除) 6 궐내 소제 임무
종8품 상문(尙門) 5 궁문에 관한 일을 맡음
정9품 상경(尙更) 6 야간시각 통보 등의 임무
종9품 상원(尙苑) 5 내원(內苑)에 관한 일을 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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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을 시위하는 내시
국왕을 시위하는 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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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내시 임무 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왕명 출납이다. 승정원 승지가 왕명 출납을 하게 되지만, 왕과 직접 대면하여 출납하는 것은 상전, 즉 승전색(承傳色)이었다. 대간이 진언할 때 승지에게 전하면, 승지가 승전색에게 다시 옮겨 왕에게 전달하기에 본뜻이 왜곡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하여 시기에 따라서는 문서로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내시부가 승정원과 달리 궁궐 밖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없었다. 이리하여 조선 중기 이후에는 궁궐 안에다 내시의 처소인 내반원(內班院)을 따로 두기도 하였다. 경복궁에는 경회루 남문 서쪽에, 창덕궁에는 선정문 안 동쪽에 각각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12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경도(京都) 하(下).

승전색은 임금의 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자이기에 왕의 총애를 믿고 위세를 부릴 때도 많았다. 연산군 때 승전색 김자원(金子猿)의 위세가 대단하여, 지체 높은 양반이라도 그에게 아부하지 않고는 승진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는 글귀를 나무패에 새겨 내시들 목에 걸도록 하였다는124)『연산군일기』 권52, 연산군 10년 3월 갑술(13일). 신언패(愼言牌) 고사에서 보듯이, 승전색은 낭떠러지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외줄타기 신세였음이 분명하다.

내시는 이와 같은 기본 임무 외에도 국가적인 대규모 공사를 감독하거나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내수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는 것도 맡아 하였다. 또한 특수한 임무를 띠고 지방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는 일도 잦았다. 연산군 때 전국 각지의 처녀를 기생으로 뽑아 올린 채홍사(採紅使)도 내시의 몫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는 사대부 중심의 유교 사회이기 때문에 내시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문제가 되었던 내시의 발호 같은 상황이 별로 없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 바가 크다. 물론 최고 권력 측근에서 생활하는 자여서 붕당 정치(朋黨政治)하에서는 권력를 쫓는 시녀 역할을 하다가 묵숨을 잃은 내시도 많았다.

한편 업무 속성상 학문에 능통하지는 않더라도 『논어(論語)』·『맹자(孟子)』 등 사서(四書)와 『소학』이나 『삼강행실(三綱行實)』 정도는 기본적으로 익혀야만 했다. 때때로 이런 과목을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통(通)하지 못하면 승진에 불이익을 받기도 하였다. 내시에게 삼경(三經)의 과목까지 요구하지 않은 것은 명실상부한 양반의 소양까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글귀나 잘 익혀 심부름이나 착실히 잘하라는 뜻이 엿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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