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1. 왕국의 이념과 왕실의 권위
  • 고대 국가에서 왕의 권위
  • 하늘의 존재와 왕의 권위
신병주

고대 국가가 성립할 무렵에 하늘은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단군 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 공히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하늘은 역사의 시작과 함께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보여 주는 단군 신화(檀君神話)에 나타난 천손 의식(天孫意識)을 비롯하여 삼국의 기원에 나타나는 시조들의 하늘과의 연관성은 하늘의 신성한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고대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 역시 자신들의 기원을 하늘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동북아 민족 사이에는 지상의 여인이 하늘의 빛을 받아 하늘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도 고조선의 기원을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으로 이어지는 천신(天神)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나, 부여·고구려 등 북방의 부여족(夫餘族) 계통에서 동명을 시조로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동명(東明)’은 ‘하늘의 빛’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식은 제천(祭天) 의식으로 연결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등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동예, 삼한 등의 각 나라에서 제천 의식을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제천 의식으로는 동맹(東盟)이 있었다. 동맹은 나라 동쪽의 큰 굴에 모셔 두었던 나무로 표현된 신을 물가로 모시고 나와 제사하는 의식이었다. 동굴 속의 신은 유폐되었던 유화(柳花)로서 고구려 건국의 여성이다. 따라서 동맹 제례는 유화가 햇빛을 쬠으로써 잉태하여 시조를 낳는다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내용을 제천 의례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127)신화에 따르면 주몽은 햇빛에 의해 잉태되어 동부여왕의 별궁에서 태어나고 금와왕의 아들이 아닌데도 왕자들과 같이 생활한다. 고구려의 건국에 대해서는 김기흥,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사, 2002 참조. 결국 고구려의 제천 의식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건국 시조를 모시는 제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 식을 통해 조상신을 숭배하고 나아가 국가의 권위와 신성성을 각인(刻印)하는 과정을 가졌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삼한(三韓) 지역에서도 제천 의식이 활발히 행해졌다. 매년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季節祭)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는 제사장인 천군(天君)이 주도하였다. 군장(君長)이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였다면 천군은 제사를 주관하면서 제정(祭政)이 분리된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제정 분리 형태는 군장의 지배력이 완전하지 않았던 고대 국가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제천 의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인들이 하늘을 신성시한 점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나 삼한 지역의 여러 나라와 달리 신라인이 제천 의례를 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원인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통해 하늘 신과 통하려 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는 시조묘(始祖廟)에 대한 제사(후에는 신궁(神宮) 제사)였다. 이는 시조왕을 제사하는 것이었는데, 신라의 건국 신화를 보면 시조왕은 천신의 권능을 대리하는 천자(天子)로 인식하였다. 즉 신라인은 시조신을 제사하면서 천신과 접촉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고구려의 동맹제와 비슷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그것이 제천이라는 중국 측 기록이 있지만, 신라는 그러한 기록이 없어서 제천을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제천이라는 기록만 없을 뿐이지 신라인들은 결코 하늘의 신성함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라 지역은 농업이 중심이 되었던 곳인 만큼 고대 사회에서 하늘에 대한 외경(畏敬)은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고대 국가에서 현저한 신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은 우리 역사의 종교 신앙이나 사상의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개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선시대 역시 하늘을 존숭하고 백성을 본위로 하는 사상은 위정자에게 영원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론서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상당 부분 강조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민간에서의 무속 행위를 차단하고 금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천 행사가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천명사상은 정치가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하늘에 대한 외경은 고대 국가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결국 고대 사회부터 고려, 조선으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하늘에 대한 권위의 강조는 점차 약화되었다. 대신에 그 권위는 천명을 받은 왕으로 대체되었다. 소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회가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도 국왕에 대한 권위가 전통시대 내내 지속된 것은 원시 사회나 고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절대적이었던 하늘의 권위를 왕이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