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1. 왕국의 이념과 왕실의 권위
  • 조선 왕의 권위
  • 왕비의 정치 참여와 수렴청정
신병주

조선시대 왕비의 역할 또한 왕이나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왕비는 경우에 따라서 왕의 곁에서 왕의 최측근으로 존재하며 정치에 직접 간여하였고,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태종의 왕비인 원경 왕후(元敬王后) 민씨나 세조의 왕비인 정희 왕후(貞 熹王后) 윤씨는 적극적으로 옆에서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도왔다. 거사를 앞둔 남편에게 용기를 심어 주는 것에서 나아가 친정(親庭) 세력까지 합세시키며 직접 권력 투쟁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오히려 왕보다 그를 둘러싼 외척(外戚)의 세력이 더 커졌으며, 19세기에는 세도 정치(勢道政治)가 기승을 부리기도 한다. 명성 황후(明成皇后) 민씨는 고종을 압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정치적 투쟁을 벌이며 앞장서 조선의 개화를 이끌어 나갔다.

왕비는 왕이 일찍 죽게 되고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수렴청정을 통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국정의 주체자(主體者)가 되었다. 수렴(垂簾)이란 신하와 왕비가 서로 상견할 수 없도록 발을 친다는 뜻이고, 청정(聽政)이란 정사(政事)를 듣는다는 뜻으로, 즉위한 왕이 너무 어린 경우에 왕실의 최존장자(最尊長者)로써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잠정적으로 왕을 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 왕후 윤씨와 함께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인수 대비(仁粹大妃) 한씨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선의 역사에서는 정희 왕후 윤씨, 인순 왕후(仁順王后) 한씨, 문정 왕후(文定王后) 윤씨, 정순 왕후(貞純王后) 김씨, 순원 왕후(純元王后) 김씨, 신정 왕후(神貞王后) 조씨 등 총 6명의 왕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신정 왕후는 철종과 고종 두 명의 왕이 재위하던 시절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은 발을 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인데, 발을 치는 것은 유교적 소산(所産)이다. 즉 대비가 왕과 왕실의 보호를 위해 정치에 참여하지만, 여성인 만큼 내외법(內外法)에 따라 발을 쳐서 남성인 신료들과의 직접 대면을 막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치 참여는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에서도 이를 참고하여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왕이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울 때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어른인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정치에 참여하는 수렴청정이 보편화되었다. 남녀의 역할 구분을 엄격히 했던 유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대비를 정치에 참여하 게 한 것은 가족 관계 안에서 자녀에 대한 모성의 지위를 바탕으로 왕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된 조선 왕조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손자나 아들인 왕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찬탈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반대로 모성과 부덕(婦德)을 기반으로 어린 왕을 정적(政敵)들로부터 보호하는 안전장치(安全裝置)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조 국가에서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로 왕위 찬탈이나 국가의 변란 등이 항상 존재하였다. 그러나 왕조 국가의 수반인 왕이 정해지지 않았다던가,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왕조 체제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가장 불안한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남성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던 유교 국가에서도 예외적으로 수렴청정이라는 제도를 두어 왕조의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의 정치 참여나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던 조선에서 여성인 대비에게 왕조 체제 유지라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수렴청정은 어린 왕의 즉위로 왕실이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여성의 권위를 빌어 왕실을 안정시킨 대표적인 장치로 볼 수 있다. 물론 누가 주체냐에 따라 왕실이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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