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2. 궁중 의례
  • 궁중 의례의 보고, 의궤
신병주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한 만큼 예법을 중시하였다. 모든 의식을 예법에 맞게 함으로써 유교의 이념에 충실하는 한편,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궁중 의례에는 혼례식, 장례식, 잔치, 즉위식, 사신 영접 등 현대에도 이어지는 의례가 있는가하면,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왕비가 누에를 치고 옷을 자는 친잠(親蠶), 왕과 신하가 함께 어우러지는 활쏘기 행사(大射禮) 등 조선의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 주는 의례도 다양하게 거행되었다.

조선시대에 거행된 궁중 의례를 살펴보려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같은 국가의 예법을 정리한 자료도 필수적으로 활용해야 하지만, 『국조오례의』는 원칙을 제시한 의례서(儀禮書)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실제로 치른 의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자료인 의궤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의궤(儀軌)’란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로써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전통시대에 주요한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선왕(先王)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주요한 국가 행사의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 둠으로써 후대에 시행착오(施行錯誤)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것이다.130)한영우, 『조선 왕조의 의궤』, 일지사, 2005 ; 김문식·신병주, 『조선 왕실 기록 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 치,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등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관련 기록을 모아 두었다가, 행사가 끝난 뒤에 의궤 편찬을 담당할 임시 기구를 만들어 의궤를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행사를 추진할 전담 기구 설치, 행사 보고서 작성,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행사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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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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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촬영한 오대산 사고
1930년에 촬영한 오대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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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에는 행사 기간 중에 국왕이 내린 명령서, 업무를 분장한 관청 간에 오간 공문서, 업무의 분장 상황, 업무 담당자의 명단, 행사 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 소요 물품, 경비의 지출 내역, 유공자에 대한 포상(褒賞) 상황이 모두 기록되어 국가 재정이 낭비되거나 딴 곳으로 전용(轉用)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의궤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림이다. 의궤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 주는 반차도(班次圖)나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을 수록한 그림책이기도 하다. 대개 천연색으로 그린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문자 기록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의궤는 기록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행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왕실은 전대의 의궤를 통 하여 선왕대의 예법을 실천하는 한편, 또 다른 의궤 제작을 통하여 왕실의 행사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왕실의 행사를 신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장으로 만들어간 것이다. 행사 후 의궤 제작을 통해 왕실 행사의 중요성을 신하들에게 각인시키는 한편, 실록을 보관했던 국가 최고의 기록물 보관 장소인 사고(史庫)에 의궤를 보관하여 의궤에 정리된 조선 왕실의 모습이 후대에까지 널리 전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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