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2. 궁중 의례
  • 궁중 의례에서 나타나는 왕실의 권위
  • 왕세자의 성장과 권위 강화
신병주

왕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백일잔치를 하였다. 백일잔치는 생각보다 검소하게 치렀다. 왕이 몇몇 정승과 승지, 산실청의 관리 3명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였다. 원자 출생 1년 만에 치르는 돌잔치는 화려하였다. 종친과 정승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성균관 유생들과 백성들에게도 떡을 돌렸다. 1791년(정조 15) 정조는 세자(후의 순조)의 돌잔치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열었다.

세자는 세 살 무렵부터 본격적인 학습에 들어갔다. 왕의 명령으로 원자를 교육시킬 ‘보양청(輔養廳)’을 설치하고, 세자의 사부(師傅, 스승)와 보양관을 뽑았다. 어린 세자가 주로 학습한 책은 왕실에서 보는 『천자문(千字文)』과 유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소학(小學)』이었다. 『소학』을 통해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유학 이념을 생활화하였다. 세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며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약을 먼저 맛 본 뒤에 올려야 한다고 배웠다. 스승에게는 최대의 예를 갖 추고 자세를 바르게 하였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영조가 사도 세자(思悼世子)에게 물려주고, 사도 세자가 다시 첫돌을 맞은 정조에게 물려준 『소학』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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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
서연관사연도(書筵官賜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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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대여섯 살 무렵이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뀌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소학』, 『효경(孝經)』, 『동몽선습(童蒙先習)』 같은 책을 주로 공부하였다. 조선시대 당시 어린 왕세자의 학습 상황은 『보양청일기』, 『강학청일기』 같은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이들 책이 다수 소장되어 있어서 원자 시절부터 세자에 대한 교육과 관심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왕세자가 성인에 이르면 혹독한 후계자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궁궐에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왕세자 한 명을 위한 교육에 최고의 선생들을 동원하였다. 이사(貳師), 빈객(賓客), 찬선(贊善), 보덕(輔德), 진선(進善), 필선(弼善) 등으로 불린 20명 남짓의 스승은 세자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세자와 스승 간의 학습을 서연이라 하였다. 왕과 신하 간의 수업이 경연이라면, 서연은 그 전단계의 학습인 셈이었다. 왕세자의 서연도 왕의 경연처럼 조강(朝講, 해 뜨는 시간에 하는 강의), 주강(晝講, 정오 무렵에 하는 강의), 석강(夕講, 오후 2시경에 하는 강의)의 하루 세 번이 기본이었고, 소대(召對)와 야대(夜對) 같은 비정규적인 강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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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강반차도(會講班次圖)
회강반차도(會講班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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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같은 국난을 당했을 때도 왕세자인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서연이 계속 이루어질 정도로 조선의 왕실에서는 서연을 매우 중시하였다. 서연에서는 왕세자가 왕이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과목들을 강의와 토론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이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조선 왕들의 업적에 관한 책이 주요 학습 대상이었다. 왕이 참석하여 세자의 교육을 점검하는 회강(會講)도 이루어졌다. 회강은 요즈음으로 치면 학습 발표회인 셈이다.

왕세자라 할지라도 시험은 피할 수가 없었다. ‘고강(考講)’이라 하여 정기적인 시험을 치렀다. 주로 책을 외우고 뜻풀이를 하는 것으로, 성적표까지 받았다. 성적은 시강원의 관리들이 채점하였는데, 통(通, 우수), 약(略, 보통), 조(粗, 부족), 불(不, 낙제)의 네 등급으로 매겼다.

왕세자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대해서는 위상을 높이는 각종 통과 의례(通過儀禮)가 있었다. 왕세자 관련 대표적인 의례로는 책례(冊禮), 입학(入學), 관례(冠禮), 가례(嘉禮)가 있었다.

책례는 왕세자가 왕의 후계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식 의식이었다. 책례는 왕이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고, 세자가 이를 하사받는 의식이다. 『중종실록』에는 “세자의 나이가 반드시 여덟 살이 되어야 책봉했던 것은 시선(視膳, 왕이 들 수라를 살펴봄), 문안(問安), 입학의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여덟 살 무렵에 책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왕자 가운데 왕세자를 책봉하면 『세자책례도감의궤(世子冊禮都監儀軌)』를, 왕손 가운데 왕세손을 책봉하면 『왕세손책례도감의궤(王世孫冊禮都監儀軌)』을 만들었다. 왕세자 책봉식은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될 후계자를 결정하는 행사였으므로, 의식도 복잡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국왕이 공식 예복인 면복(冕服)을 입고 정전(正殿)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며, 책봉된 왕세자나 왕세손은 상징물로 죽책(竹冊)과 옥인(玉印)을 받았다.133)김문식, 『조선의 왕세자 교욱』, 김영사, 2003, 129∼130쪽.

적장자 세습이 원칙인 조선시대에 왕비 소생의 장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8명에 불과하였다. 적장자로서 세자로 책봉은 되었지만 자질에 대한 문제,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도 7명이나 있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조선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서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였다. 성균관 대성전에 있는 공자와 네 명의 성인(聖人)의 신위(神位)에 잔을 올리고, 명륜당(明倫堂)에서 스승에게 예를 행하고 가르침을 받는 의식이다. 왕세자의 입학례는 ‘차기의 태양’ 왕세자의 통과 의례에서 매우 큰 행사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기록화로 남겼다. 1817년(순조 17) 순조의 아들인 익종(翼宗, 효명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 모습은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이라는 병풍으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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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종대왕입학도(翼宗大王入學圖)
익종대왕입학도(翼宗大王入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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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 입학과 함께 왕세자가 성인이 되는 통과 의례로는 관례(冠禮)가 있었다. 관례는 오늘날 성년식(成年式)을 말하는 것으로,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에 관례라 하였다. 일반 사대부의 자녀는 통상 결혼하기 전 15세에서 20세에 관례를 치른 반면, 왕세자의 경우 책봉식을 치른 후인 8세에서 12세 정도에 관례를 거행하였다. 관례를 치르면서 어엿한 성인이 된 왕세자는 혼례를 행하였다. 혼례식은 대개 관례를 행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관례가 8세에서 12세 정도에 이루어진 만큼 혼례식은 10세에서 13세 정도의 나이에 거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혼례를 가례(嘉禮)라 하고, 왕이나 왕세자의 혼례식의 전 과정을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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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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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 입학, 관례, 혼례를 치르면서 성인으로서, 차기 왕으로서의 통과 의례를 무사히 마친 왕세자. 그러나 왕으로서의 즉위가 반드시 보장되지는 못하였다. 선왕의 수명이나 의중, 세자의 자질, 정치적 역학 관계 등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자질 문제로, 소현 세자와 사도 세자가 각각 인조, 영조와 뜻이 맞지 않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만큼 왕세자가 왕이 되는 길은 험난했던 것이다. 왕세자에 대한 의식을 철저하고 화려하게 한 것 역시 왕의 권위를 미리부터 과시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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