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
  • 4. 궁중 유물
  • 왕실의 도장, 어보
  • 보인의 사용과 왕실의 권위
신병주

보인의 사용과 왕실의 권위

영조는 만년에 세손인 정조의 청을 받아들여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사도 세자를 비난하는 기록을 삭제하고 ‘효손(孝孫)’이라 새긴 은인(銀印)을 만들어 정조에게 하사하였다. 이후 정조는 행차를 할 때마다 이 도장을 행렬의 제일 앞에 배치하였는데, 이는 자신에 대한 영조의 신뢰를 보여 주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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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은인(正祖銀印)
정조 은인(正祖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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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은인의 외함(外函)
정조 은인의 외함(外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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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인면(印面)
정조 인면(印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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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은 국가의 공식 도장이므로 크기나 용도가 세세히 정해져 있었다. 보인은 주인의 위격(位格)에 따라 모양과 내용을 정하였고, 같은 인물의 보인이라 하더라도 용도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보인을 폐기하고 이를 대체할 보인을 만들 때에는 모양이 같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규격을 정해 두었다.148)보인의 제작과 관련 의궤에 대해서는 김문식·신병주, 「왕실에서 사용한 도장에 관한 기록 『보인소의궤』」, 『조선 왕실 기록 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135∼150쪽 참조.

<표> 『보인소의궤』 수록 보인의 내용
구분

인문
재료 유(鈕) 전각
(郭)
형상
(形象)

(長)

(廣)
두고
(頭高)
체고
(體高)
미고
(尾高)

(高)

(面)

(厚)

(方)

(高)

(廣)
변광지고
(邊廣只高)
율감
(栗甘)
각심
(刻深)
조선국왕지인
(朝鮮國王之印)
은도황금
(銀鍍黃金)
머리는
용,
몸체는
거북
(龍頭龜身)
4촌
(寸)
1분
(分)
2촌
4분
2촌
6분
1촌
7분
        4촌 1촌
1분
        5분
대조선국주상
지보(大朝鮮國
主上之寶)
은도황금 거북
(龜)
4촌
8분
2촌       1촌
8분
    4촌
2분
1촌 4촌
1분
      5분
조선왕보
(朝鮮王寶)
은도황금 거북
(龜)
4촌
8분
2촌       1촌     4촌
4분
1촌         3분
위정이덕
(爲政以德)
은도황금
(直)
          2촌
3분
1촌 8분 3촌
5분
1촌     1촌   3분
소신지보
(昭信之寶)
은도황금 거북
(龜)
4촌
7분
2촌       1촌
8분
    3촌
9분
9분         2분 반
시명지보
(施命之寶)
금도황금
(金鍍黃金)
거북
(龜)
4촌 2촌       1촌
2분
    4촌
9분
          3분 반
유서지보
(諭書之寶)
동도황금
(銅鍍黃金)
거북
(龜)
4촌 2촌       1촌
8분
    3촌
6분
1분         3분 반
과거지보
(科擧之寶)
동도황금 거북
(龜)
4촌
1분
2촌       1촌
7분
    3촌
5분
8분         3분
선사지기
(宣賜之記)

(直)
          1촌
9분
1촌
3분
8분 2촌
9분
1촌     1촌   1분
무위소
(武衛所)
은도황금 거북
(龜)
4촌
7분
2촌       1촌
8분
    3촌
9분
1촌         6분
왕세자인
(王世子印)
옥(玉) 거북
(龜)
4촌
8분
3촌       2촌
3분
    4촌
2분
1촌
4분
        5분

현재 보인의 제작에 관한 기록은 의궤의 형태로 전해 오고 있다. 『금보 개조도감의궤(金寶改造都監儀軌)』는 1705년(숙종 31)에 종묘와 영녕전에 있던 금보를 새로 제작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종묘에는 역대 국왕의 신주와 함께 금보·옥책이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도 오랫동안 수리하지 못한 채로 있다가 숙종대에 와서야 없어진 금보를 보충하고 금보를 보관하던 보갑(寶匣)을 수리하였던 것이다. 또한 숙종은 태조의 사조(四祖)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와 신의 왕후(神懿王后, 태조의 정비)의 금보를 처음으로 만들어 종묘에 올렸다. 이는 조선 왕실의 뿌리인 선조들의 도장을 만들어 권위를 높임으로써 결국에는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책보개수도감의궤(冊寶改修都監儀軌)』는 인조의 비인 장열 왕후(莊烈王后)의 책보(冊寶)를 제작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1687년(숙종 13) 9월 2일에 대왕대비(장열 왕후)가 거처하던 만수전(萬壽殿)에 불이 나서 대비가 입던 의복과 생활 용품들이 타버리고 책보도 불에 그을리는 손상을 입었다. 이에 숙종은 대왕대비의 책보를 새로 제작하도록 하였는데, 이 과정을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 『책보개수도감의궤』이다.

『옥인조성도감의궤(玉印造成都監儀軌)』는 1735년(영조 11) 효장 세자(孝章世子, 영조의 첫째 아들)의 빈인 조씨(조문명의 딸, 뒤에 효순 왕후로 추존됨)를 현빈(賢嬪)으로 책봉하면서 내린 옥인의 제작에 관한 기록이다. 보인 제작의 과정을 의궤로 제작한 것은 그만큼 왕실에서 사용한 도장의 권위를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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