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1. 왕실의 행사와 음악
  • 왕실 의례와 음악, 예와 악
송지원

조선 왕실의 각종 행사는 오례(五禮), 즉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 중의 하나로 거행하였다. 행사의 종류에는 제사, 혼례, 조회(朝會), 책봉례(冊封禮), 존호 의례(尊號儀禮), 각종 연향(宴饗), 외국 사신 접대, 활쏘기, 사냥, 죽음과 관련한 다양한 의례 등이 있는데, 이러한 행사는 각 시기마다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였다. 해마다 같은 날 치르는 행사가 있는가 하면, 특정한 날을 정해서 치르는 행사도 있어서 왕실의 한 해는 각종 행사로 분주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여러 행사는 예악 사상(禮樂思想)에 기반을 두고 제정된 각종 의례의 의주(儀註)에 절차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례 중의 길례(吉禮)는 천·지·인에 대한 각종 제사 의례가 중심이 되며, 가례(嘉禮)는 혼례·조회·조하(朝賀)·책봉례·양로연(養老宴) 등의 의례, 빈례(賓禮)는 중국과 이웃 나라의 사신 맞이와 관련한 의례, 군례(軍禮)는 활쏘기 등의 군사 관련 의례, 흉례(凶禮)는 왕실의 상장례(喪葬禮)와 관련된 의례를 포함한다. 이들 의례를 포괄적인 의미에서 국가 전례(國家典禮)라 한다.

국가 전례란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로서, 한 국가가 추구하는 이념적 지향과 도덕적 가치가 일정한 의례의 틀로 가시화되고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행한 국가 전례를 통해 예악 정치(禮樂政治)를 표방한 조선이 유교적 예치 국가(禮治國家)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과정에서 추구한 국가 예제(國家禮制)의 전형적 틀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의례 가운데 대부분은 악(樂)이 수반되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란 유가(儒家) 악론(樂論)에서 말하는 총체적 의미의 ‘악’으로서 악(樂)·가(歌)·무(舞), 즉 기악, 노래, 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이다. 예와 악이 상보적(相補的)으로 결합된 각종 의례의 의주를 통하여 외부적으로 구현된 예와 악의 질서를 시·공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국가 전례이자 왕실의 행사인 이들 의례의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을 이해하는 것은 조선이 추구하는 예와 악을 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오례로 규정되어 시행된 왕실 행사 중의 여러 의례와 음악은 예와 악의 이념이 외부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왕실의 각종 의례에 음악이 수반되는 것은 예와 악의 상보 관계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예와 악은 각각의 기능이 있다. 유가 악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는, ‘예’는 질서를 위한 것으로 ‘악’은 화합을 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예’가 다르게 하는 것이라면 ‘악’은 같게 하는 것이며,155)『예기(禮記)』 권18, 악기(樂記). “禮者爲異, 樂者爲同.” 예는 행실을 절도 있게 하고 악은 마음을 온화하게 하며, 절도는 행동을 절제하고, 온화함은 덕을 기르는 것이며, 악이 지나치면 방종에 흐르고 예가 지나치면 인심이 떠난다고 설명한다.156)『예기』 권18, 악기. “樂勝則流, 禮勝則離.” 나아가 예악을 통해 덕(德)을 함양하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러한 「악기」의 논리가 곧 예악 정치의 기반을 이룬다. 따라서 예악 정치는 예와 악 두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 실행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하게 된다. 오례 가운데 하나로 시행된 각종 의례에 음악이 수반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예와 악의 중요성은 조선의 역대 제왕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문물 정 비의 일환으로 예와 악을 정비하고 새로운 음악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과 성종·숙종·영조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루어진 예악의 재정비를 위한 여러 정책은 모두 예악 정치를 이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예악 정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에 비해 ‘악’이 소홀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는 잘 갖추어졌어도 악은 미비하게 되어 예와 악이 균형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대의 명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예와 악은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는데, 오로지 예학만이 극성하고 악학을 익히지 않아 폐단이 있다.”157)이형상(李衡祥), 『병와선생집(甁窩先生集)』 권18, 행장(行狀).라는 말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예와 악의 불균형을 지적하는 논의는 매우 많았고, 악이 미비하다는 이야기가 대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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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미비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는 ‘예’와 ‘악’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양상이 서로 차이나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전란을 겪은 후 악기가 훼손되고, 악생(樂生)이나 악공(樂工)의 인원수를 제대로 채울 수 없어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어려워지면서, 심지어 음악 없이 제례(祭禮)를 올렸던 적도 있었다. 또 음악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음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였다. 이러한 현실이 예와 악의 균형을 잃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다.

또 ‘악’과 ‘악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분화(二分化)된 시각도 예와 악의 균형을 잃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악’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궁중에서 ‘악’을 담당하는 사람과 그 기예(技藝)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음악 연주를 담당하는 음악 전문인인 악공이 하는 음 악 행위는 일종의 신역(身役)으로 부과되었으므로 능동적인 음악 행위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와 같은 왕실의 음악이 소통되는 특성이 ‘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의 예와 악이 고르게 균형을 이룬 상태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부과한다. 따라서 조선의 문물 정비기로서 중요한 시기인 세종대부터 오례서(五禮書)나 악서(樂書)를 편찬하고자 하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결과의 결과물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또 오례서와 병행하여 『세종실록악보(世宗實錄樂譜)』를 만들었다. 세조대의 음악을 기록한 『세조실록악보(世祖實錄樂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오례서, 악서와 함께 편찬되는 것은 법전(法典)이다. 오례서의 편찬을 통해 국가 전례를 정비하고, 악서 편찬을 통해 음악을 정비하며, 법전 편찬을 통해 예법 질서를 정비하는 것은 예악 정치를 성실히 구현하고자 한 역대 왕이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이었다. 성종대에 오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악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나온 것은 이러한 구도 아래 이루어진 업적이었다. 또 영조대에 이루어진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계통의 오례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악고(樂考)」·『국조악장(國朝樂章)』 같은 악서, 『속대전(續大典)』 같은 법전 또한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들 오례서·악서·법전의 내용은 대부분 실제 법전과도 같은 효력, 혹은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조선시대 국가 전례 시행을 위한 기본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실에서 행해진 각종 의례의 종류와 내용, 그리고 시행 절차를 기록한 의주의 세부 내용을 이해한다면, 좁게는 조선 왕실의 행사와 음악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넓게는 조선 예악 정치의 내적·외적 질서의 구도를 파악하는 데까지 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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