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1. 왕실의 행사와 음악
  • 국장과 음악
송지원

왕이 승하하면 국장도감(國葬都監)과 함께 빈전도감(殯殿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 부묘도감(祔廟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등의 임시 기구가 각각 설치되어 국장과 관련한 일을 담당한다. 이 가운데 국장도감에서는 왕이 승하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국장에 관련된 모든 행사를 총괄하고 관련 기록을 남긴다. 영조의 국장을 치른 예를 통하여 조선시대 국장의 일반 절차를 살펴본다.

영조가 승하하자 내시(內侍)가 복의(復衣)를 받들고 동쪽 낙수받이에 사닥다리를 놓고 올라가 고복(皐復)하였다. 이어 협시(挾侍)는 왕세손을 부축하여 침문 밖에 나가 거애(擧哀)하였다. 고복이 끝나 가면,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복의를 받들어 어상(御床) 옆에 놓은 뒤 자리(位)를 설치하고 곡(哭)을 하였다. 같은 날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장례의 여러 전례에 대해 아뢰었는데, 이미 행하였던 국상의 예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같은 전례서(典禮書)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여 행례 절차 일반을 마련하였다. 초상(初喪)부터 졸곡(卒哭)까지는 대사, 중사, 소사 등의 모든 제사를 멈추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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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여 행렬
영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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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탕(香湯)으로 시신을 씻기는 목욕례(沐浴禮)를 행한 후에는 습례(襲禮)와 반함례(飯含禮)가 이어지는데, 영조의 경우 왕세손(후에 정조)이 반함례를 행하였다. 손을 씻은 후 숟가락으로 쌀을 떠서 대행왕(大行王)인 영조의 입 오른쪽에 넣고, 이어서 구슬(珠) 하나를 먼저 넣은 후 왼쪽, 가운데에도 쌀을 떠 넣었다. 다음날에는 여묘(廬墓) 살 곳으로 3칸 규모의 초가(草家)를 세웠으며, 같은 날 소렴례(小殮禮)를 행하였다. 소렴을 치른 다음날에는 시신에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대렴례(大殮禮)를 한 후 재궁(梓宮)을 내렸다. 계속하여 성복례(成服禮)를 행한 후 대행 대왕의 시호(諡號)와 묘호(廟號)·전호(殿號)·능호(陵號)를 정하였다. 이후 발인하기 직전에 문 앞에서 올리는 견전의(遣奠儀), 왕의 상여인 대여(大輿)를 능으로 운구하는 발인의(發引儀), 성문 밖에서 지내는 노제의(路祭儀)에 이어 천전의(遷奠儀), 입주전의(立主奠儀), 반우의(返虞儀), 안릉전의(安陵奠儀) 등의 의례를 행하였다.

국상이 났을 때에는 기본적으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따라서 3년 동안은 온 나라에서 음악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음악 소리를 내는 것은 불법이었다. 왕의 발인 행렬인 발인 반차(發引班次)는 각종 길의장(吉儀仗)과 흉의장(凶儀仗) 등이 따르고, 왕이 살아서 능행(陵幸)을 할 때의 규모 이상으로 온갖 의장이 따른다. 발인 행렬의 앞부분에는 곡을 하며 따라가는 궁인(宮人)을 배치시켰다. 이들을 곡궁인(哭宮人)이라 하는데, 숫자는 대개 10∼20명으로 하였지만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영조·숙종·경종의 국장 시에는 20명의 곡궁인이, 정조의 국장 시에는 10명이, 순조의 국장 시에는 14명이, 명성 황후의 국장 시에는 16명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사방을 휘장으로 둘러친 채 곡을 하면서 행렬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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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궁인
곡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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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 행렬에는 악대도 포함된다. 발인 행렬의 악대와 왕의 생전에 수행하는 악대의 차이는 왕의 생전에 수행하는 악대가 연주를 우렁차게 하여 왕의 위엄을 드러낸다면 발인 행렬에서는 악기만 갖추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을 “베풀기는 하지만 연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진이부작(陳而不作)”이라 한다. 왕의 시신을 눕힌 대여가 궁궐을 나와서 왕이 묻힐 능까지 가는 길에 수행하는 악대는 전부 고취(前部鼓吹)와 후부 고취(後部鼓吹)이다. 이때 전악(典樂)은 악대를 이끈다. 악대는 악기만 갖추었을 뿐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묵묵히 행렬을 따른다. 그 규모는 살아 있을 때 행하는 대가(大駕)의 절반 규모로 감한다. 슬픔을 극진히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비록 연주는 하지 않지만 전부 고취와 후부 고취를 행렬에 따르게 하는 것은 왕의 위의(威儀)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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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 악기 축
명기 악기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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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 악기 어
명기 악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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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재궁을 광중(壙中)에 부장할 때에는 여러 기물과 악기 등의 명기(明器)를 함께 묻는다. 명기를 부장하는 것은 죽은 이가 사후에 머물게 될 지하 세계에서도 일상 세계와 같은 생활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이다. 이 명기 이외에도 복완(服玩)이라 하여 몸차림과 관련된 것이 포함된다. 명기 악기(明器樂器)는 축소형으로 제작하는데, 만드는 재료나 방법에 따라 담당 제작처가 다르다. 예컨대 자기(磁器)는 사옹원(司饔院)이, 와기(瓦器)는 공조(工曹)가, 목기(木器)와 죽기(竹器)는 국장도감의 이방(二房)에서 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부장하는 악기의 종류와 숫자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영조국장도감의궤(英祖國葬都監儀軌)』의 명기 악기는 종(鐘)·경(磬)·훈(壎)·지(篪)·금(琴)·슬(瑟)·생(笙)·소(簫)·고(鼓) ·축(祝)·어(敔) 등 11종 아악기(雅樂器)가 있는데, 이들 악기는 악기궤(樂器櫃)에 넣어 부장되었다. 악기들을 궤에 넣을 때의 배열도가 각종 국장도감의궤에 보인다. 명기 악기는 주척(周尺)을 단위로 하며, 모두 축소형으로 매우 작게 만든다. 광중에 부장하는 물건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크기를 작게 해야 한다. 명기 악기의 구체적인 치수는 표 ‘『영조국장도감의궤』의 명기 악기 치수와 현대 수치 비교’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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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궤의 배치도
악기궤의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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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영조국장도감의궤』의 명기 악기 치수와 현대 수치 비교
악기 영조 국장 명기 치수 현대 수치 환산(1주척(周尺)=20㎝)
길이 4촌(寸)(선충 포함) 위 1촌, 아래 2촌 길이 8㎝(선충 포함), 위 2㎝, 아래 4㎝
거장 2촌, 구장 1촌 5푼 거장 4㎝, 구장 3㎝
위 2촌, 중간 원경 1촌 4푼 위 4㎝, 중간 원경 2.8㎝
길이 3촌 길이 6㎝
길이 4촌 7푼, 너비는 위 1촌 3푼, 아래 1촌 길이 9.4㎝. 너비는 위 2.6㎝ 아래 2㎝
길이 6촌 5푼, 너비 1촌 5푼
25현
길이 13㎝, 너비 3㎝
25현
박의 높이 1촌 5푼, 원경 1촌 박의 높이 3㎝
틀의 길이 1촌 8푼 틀의 길이 3.6㎝
길이 2촌 5푼, 원경 2촌 길이 5㎝, 원경 4㎝
높이 2촌 3푼, 윗변 길이 2촌 5푼 높이 4.6㎝, 윗변 길이 5㎝
길이 3촌, 너비 1촌 5푼 길이 6㎝, 너비 3㎝

이처럼 영조의 국장 때 부장한 명기 악기는 모두 아악기였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아악기, 당악기(唐樂器), 향악기(鄕樂器)를 모두 부장하였다. 방향(方響)·당적(唐笛)·당비파(唐琵琶)·대쟁(大箏) 등의 당악기와 거문고·가야금(伽倻琴)·향비파(鄕琵琶)·대금(大笒) 같은 향악기도 명기 악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 나무로 만든, 음악 연주자인 목공인(木工人) 33개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 목가인(木歌人) 8개도 함께 부장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나무로 만든 노비인 목노(木奴) 50개와 목비(木婢) 50개도 광중에 함께 묻었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사람을 부장하는 전통은 정조대에 제작한 『영조국장도감의궤』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목노비·목공인·목가인 등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을 부장품에서 제외한 이유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공자의 “산 사람을 사용하는 것과 가깝지 않은가.”168)『예기』 권4, 단궁(檀弓) 하(下). 孔子謂 爲芻靈者善, 謂爲傭者不仁, 不殆於用人乎哉.라는 설을 따른 것이다.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을 부장한다면 마침내는 사람을 순장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하여 결국 폐지되었다.169)『국조오례의』, 서례고이(序例考異). 흉례고이(凶禮考異). 明器木奴婢五十今罷. 今上甲子, 以木奴婢, 恐啓後日, 用殉之弊, 特命革罷.

<표> 명기 악기의 시기별 비교
악기 왕
(황후)
세종오례 숙종국장 경종국장 영조국장
(圖說)
정조국장
(圖說)
명성황후
(有圖說)
편종(編鐘) 와종(瓦鐘) 16 와종 16 와종(瓦鍾) 16 × × ×
편경(編磬) 와경(瓦磬) 16 와경 16 와경 16 × × ×
특종(特鐘) 와특종(瓦特鐘) 와특종 와특종 종(鐘, 동으로 만듦) 종(鍾, 동으로 만듦) 종(鐘)
특경(特磬) 와특경(瓦特磬) 와특경 와특경 경(磬, 자기를 씀) 경(磬, 백토(白土)를 씀) 경(磬)
방향(方響) 와방향(瓦方響)
16
와방향 16 와방향 16 × × ×
훈(壎) 와훈(瓦壎) 와훈 와훈 훈(壎, 와토(瓦
土)로 구워 만듦)
지(篪)
관(管) × × ×
당적(唐笛) 적(笛) 당적(唐笛) 당적 × × ×
약(籥) × × ×
우(羽) × × ×
통소(洞簫) × × ×
당필률(唐觱篥) × × ×
향필률(鄕觱篥) × × ×
대금(大琴·大笒) 대금(大琴) 대금(大琴) × × ×
당비파(唐琵琶) × × ×
향비파(鄕琵琶) × × ×
현금(玄琴) × × ×
가야금(伽倻琴) × × ×
박(拍) × × ×
생(笙)
우(竽) × × ×
화(和) × × × ×
금(琴)
슬(瑟)
소(簫) × × ×
대쟁(大箏) × × ×
아쟁(牙箏) 악쟁(樂箏) × × ×
절고(節鼓) × × ×
장구(杖鼓) × × ×
고(鼓) 교방고(敎坊鼓) × ×
축(祝)
어(敔)
  31종 31종 31종 11종 11종 11종
✽송지원, 「조선시대 명기 악기의 시대적 변천 연구」, 『한국 음악 연구』 39, 한국 국악 학회, 2006.

정조대의 『영조국장도감의궤』부터 명기를 아악기로만 부장하는 전통은 정조의 아악 부흥 노력과 일치하는 것이다. 정조는 집권 초반부터 고악(古樂)을 회복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고, 당시에 편찬한 악서 『시악화성(詩樂和聲)』의 악기 항목에서도 아악기만을 기록해 놓아 그러한 노력의 일단을 보여 준다. 정조대 이후 왕의 광중에 부장하는 악기는 아악기로 고정되었다. 세종대부터 고종대까지의 명기 악기의 종류는 표 ‘명기 악기의 시기별 비교’와 같다.

명기 악기는 국장도감의 이방에서 제작과 조달을 주로 담당하였는데, 정조대를 기점으로 악기의 종류와 재료 등이 변화한다. 정조대 이전의 명기 악기에는 아악기, 당악기, 향악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악기의 종류가 31종으로 다양하였으나 정조대 이후에는 아악기만 부장하여 11종으로 축소되었다. 또 일부 악기는 제작 재료도 달라졌다. 경종대에 제작된 『숙종국장도감의궤(肅宗國葬都監儀軌)』의 명기 악기인 종과 경은 진흙을 구워 만드는 와종(瓦鐘)과 와경(瓦磬)이지만 영조 국장(정조대)부터 그 이후로 종은 동으로 만들어서 악기의 원 재료에 가깝게 되었고 경은 백토를 사용한 자기로 만들어서 견고함을 더하였다. 이렇게 만든 명기 악기는 악기궤에 넣고 어교(魚膠)로 바닥을 고정시킨 후 악기궤 채여(彩轝)에 실려 능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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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궤 채여의 이동 모습
악기궤 채여의 이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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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初喪)으로부터 27개월에 지내는 담제(禫祭) 이후에는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게 되는데, 이를 부묘의(祔廟儀)라 한다. 부묘의는 흉례에 속하지만 만 3년을 모두 채운 이후 시향제(時享祭), 즉 매해 봄·여름·가을·겨울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로 옮아가는 과정에 있는 의례이기 때문에 그 의례의 성격이 보통의 흉례와 다르다. 따라서 신주를 종묘로 모시고 갈 때 신련(神輦)의 앞뒤를 따르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한다. 발인 반차에서 악대를 배치는 하지만 연주하지 않는 것과 차별화된다. 부묘의에서 신주를 신좌(神座)에 안치한 이후에는 흉례의 예가 아닌 길례 시향(時享)의 예로써 행하므로 등가와 헌가, 문무와 무무가 모두 제례악을 연주한다. 이후 왕의 행렬이 궁으로 돌아가면 제사 의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것과 같은 예로써 기로(耆老)와 유생(儒生) 그리고 교방(敎坊)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환궁(還宮)한 이후에는 가례의 영역에 속하는 하례와 음복연을 잇따라 행함으로써 흉례-길례-가례라는 연속성의 측면에서 의례를 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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