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2. 왕실 행사의 음악 담당자들
  • 장악원 제조
송지원

장악원 제조는 장악원의 업무를 총괄하는데, 종1품, 정2품, 종2품 사이의 문신이 겸하였다. 그들은 오례로 거행되는 여러 국가 전례에서 쓰이는 악무와 관련된 일, 예컨대 음악 연주가 잘 되고 있는지, 의례에서 노래하는 악장의 내용은 그 의미에 걸맞은지, 음률은 제대로 되었는지, 무동·여기(女妓)·의녀(醫女)·침선비(針線婢) 등은 춤을 제대로 추고 있는지, 악공과 악생이 연주하는 음악이 의례와 맞게 연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하였다. 악기를 제작할 때는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고, 음악과 관련된 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검토한 후 수정하는 일도 담당하는 업무였다. 아울러 조선 악학의 부흥을 위한 노력도 장악원 제조에게 부여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심지어 한여름에 춤을 담당한 공인에게 더위를 가시게 하는 약을 나누어 주는 일도 장악원 제조가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음악 연주가 잘못되면 장악원 제조를 종중추고(從重推考)하는 일도 있었다. 수없이 많은 궁중의 행사에서 연행하는 악·가·무에 대해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던 장악원 제조는 겸직으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맡은 업무는 상당히 과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장악원 제조는 음악 전문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의 음악 실력은 개인차가 있었다. 장악원 제조가 음악도 잘 알고 악기 연주에도 능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장악원 제조로 임명할 사람을 가능한 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인물을 선정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지만 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장악원이 담당하는 일이 예악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덕을 갖춘 인물을 제조로 선임하려 한 노력도 보인다. 성종대에 장악원 제조 유자광(柳子光)이 덕망이 없어 적합하지 않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던 사실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또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을 장악원 제조로 쓰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성종대에 장악원 제조를 지낸 성현(成俔)은 음률(音律)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조로 천거된 경우이다. 1493년(성종 24)에 장악원 제조 유자광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근무하고 있던 성현을 추천하였다. 악공이나 악생의 연주에 대해 시험을 볼 때, 장악원 제조가 음률을 잘 알고 있어야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 실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성현은 장악원 제조로 일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왔다. 유자광은 성종 앞에서 “경상 감사(監司)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장악원 제조는 성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171)『성종실록』 권281, 성종 24년 8월 을축(3일).라고 추천하였다. 유자광 자신이 장악원 제조로 임명되었을 때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자기와 함께 제조로 일할 사람은 음악성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니 그 결함이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장악원 제조는 장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악기를 늘 점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망가진 악기는 모두 수리해서 잘 손질해 놓아야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79년(성종 10)에 장악원 제조 윤사흔(尹士昕)은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 제향(祭享)과 조회(朝會)에 쓰는 편종을 잃어버리거나 깨뜨렸는데, 공조(工曹)에서 간수인(看守人)으로 하여금 잡동철(雜銅鐵)을 징수하게 하여 법칙대로 주성(鑄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률이 맞지 않습니다. 그 잡동철은 호조(戶曹)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정동(正銅)을 써서 법칙대로 고쳐 주성하게 하소서. 또 세종조(世宗朝)에 주성한 편종이 화재로 없어진 뒤에 교정(校正)을 지금까지 행하지 않고 있으니, 모름지기 교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편경도 많이 헐고 깨어졌는데, 지금까지 만들지 않았으므로 소리의 음률이 완전하지 않으니, 매우 마땅하지 못합니다. 때에 미쳐서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 예조(禮曹)에서 기생과 악공이 열악(閱樂)할 때에 아울러 아악을 연주하는데, 악기가 모두 제향에 쓰는 바이므로, 운반할 때에 더러워지고 헐게 될 뿐만 아니라 무례(無禮)하기가 막심합니다. 지금부터 열악할 때와 본원(本院)에서 습악(習樂)할 때에 쓰는 악기를 별도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172)『성종실록』 권103, 성종 10년 4월 을사(19일).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는 편종은 제대로 된 동으로 만들지 않아 음률이 맞지 않으니 다시 주조해야 하고 편경도 새롭게 제작하자는 것, 그리고 연습용 악기와 실제 연주하는 악기를 구분해서 사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건의도 제조 자신이 음악적인 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연습용 악기를 별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건의 또한 합리적인 내용이다.

1484년(성종 15) 장악원 제조 윤필상(尹弼商)과 변포(卞袍)는 종묘와 영녕전의 제례악을 다르게 쓰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묘에는 향악을 쓰고 영녕전에는 아악을 쓰고 있습니다. 종묘와 영녕전은 일체(一體)인데, 『오례의(五禮儀)』 주(註)에도 이르기를, “종묘에는 보태평악(保太平樂)에 정대업무(定大業舞)를 쓰고, 영녕전에도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 음악을 쓰는 것이 각각 다르니, 적당하지 못합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종묘 제례악과 영녕전의 제례악은 동일한 종묘 제례악을 쓴다. 이러한 전통은 세조대에 확립되었고 이후 지속되었다. 두 곳 모두 돌아가신 왕과 왕비를 모신 곳이므로 음악 내용이 같은 것이 옳지만 1484년 당시에는 영녕전에 다른 음악을 썼던 듯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장악원 제조는 그러한 현실을 파악하고 오류를 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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