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3. 왕실 행사의 음악 기록
  • 왕실 행사와 악서
송지원

왕실 행사에는 반드시 악이 수반되었다. 악은 예와 상보적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예악 정치를 지향한 조선시대에는 예서와 더불어 악서 편찬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악서는 보통 예서와 법전과 같이 편찬되었다. 성종대에 성현(成俔)이 편찬한 『악학궤범』은 당시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와 법전인 『경국대전』과 함께 편찬이 이루어졌다. 또 영조대의 『국조악장』은 『국조속오례의』와 『속대전』과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다.

조선시대의 악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493년(성종 24)에 예조 판서 성현이 핵심적 역할을 하여 편찬한 『악학궤범』이다. 당시 장악원의 의궤와 악보가 오래되어 헐었고,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소략하고 틀려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악학궤범』을 펴낸 것이다. 『악학궤범』 서문에 책을 편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좋은 음악도 귀를 스쳐 지나가면 곧 없어지고, 없어지면 흔적이 없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가 있으면 모이고, 형체가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악보가 있으면 음의 느리고 빠른 것을 알 수 있고, 그림이 있으면 악기의 형상을 분변할 수 있고, 책이 있으면 시행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들이 졸렬(拙劣)한 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찬(撰)한 이유이다.182)이혜구 역주, 『신역 악학궤범(新譯樂學軌範)』, 국립 국악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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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
『악학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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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귀를 스쳐 지나간 후에는 없어진다는 음악의 특수성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악학궤범』에는 당시 사용하고 있는 음악, 악기, 복식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음악 내용을 모두 기록하였다. 『악학궤범』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서문(序文)

권1 이론 부분. 육십조(六十調), 시용아악십이율칠성도(時用雅樂十二律七聲圖), 율려격팔상생응기도설(律呂隔八相生應氣圖說), …… 악조총의(樂調總義), 오음배속호(五音配俗乎), 십이율배속호(十二律配俗乎) 등

권2 아악진설도설(雅樂陳設圖說) : 오례의등가, 오례의헌가, 시용등가, 시용헌가, 세종조회례연등가, 세종조회례연헌가, 문무, 무무속악진설도설(俗樂陳設圖說) : 오례의종묘영녕전등가, 오례의종묘영녕전헌가, 시용종묘영녕전등가, 시용종묘영녕전헌가, 보태평지무, 정대업지무 등

권3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高麗史樂志唐樂呈才) :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고려사 악지 속악정재(高麗史樂志俗樂呈才) : 무고, 동동, 무애

권4 시용당악정재도설(時用唐樂呈才圖說) :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금척, 수보록,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하성조, 성택, 육화대, 곡파

권5 시용향악정재도설(時用鄕樂呈才圖說) : 보태평, 정대업, 봉래의, 아박, 향발, 무고, 학연화대처용무합설, 교방가요, 문덕곡

권6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

권7 속부악기도설(俗部樂器圖說)

권8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 연화대복식도설(蓮花臺服飾圖說), 정대업정재의물도설(定大業呈才儀物圖說),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

권9 관복도설(冠服圖說), 처용관복도설(處容冠服圖說), 무동관복도설(舞童冠服圖說), 여기복식도설(女妓服飾圖說) 등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담겨 있는 궁중 음악 관련 기록은 매우 종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악·가·무에 대한 정보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악기, 음악 제도, 복식, 악현 등에 이르기까지 섭렵하고 있어 궁중 음악 기록의 모범이 된다.

이후 영조대에 편찬한 악서는 『동국문헌비고』의 「악고」이다.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집권 후반인 1769년(영조 45)에 왕명으로 편찬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인간(印刊)되었다.183)『영조실록』 권115, 영조 46년 8월 무인(5일)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이후 1790년(정조 14)에 『증정문헌비고(增訂文獻備考)』로 개수되었고, 1907년(융희 1)에 다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로 증보되었다.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필적할만한 예서를 염두하고 만든 만큼, 『문헌통고』에서 범례를 본받고, 우리나라 고금의 문물제도를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이 가운데 서명응이 중심이 되어 편찬된 「악고」가 포함되어 있다.

『동국문헌비고』의 「악고」는 전체 구성 가운데 「예고」와 함께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영조대의 국가 전례 정책에서 예와 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악고」의 참고 문헌은 『사기(史記)』, 『율려신서(律呂新書)』, 명나라 주재육(朱載堉)의 『율려정의(律呂精義)』, 주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임우의 『석전악보』, 성현의 『악학궤범』, 『주례』, 『송사(宋史)』, 『경국대전』, 『가례(家禮)』,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오례』, 『국조오례의』, 『조선 왕조 실록』 등으로 역사서·법전·악서 등을 망라한다.

정조대에 편찬된 악서로는 『시악화성』이 있다. 『시악화성』은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아 1780년(정조 4)에 편찬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기부터 당시의 악제(樂制)가 불분명한 것으로 인식하여 악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음률을 아는 유생을 찾는다. “예가 밝아진 후에 악이 갖추어지고, 악이 갖추어진 후에 정(政)이나 치(治)를 말할 수 있다.”184)정조(正祖),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1, 책문(策問), 의례(儀禮). 夫禮明然後樂備, 樂備然後, 可以言政, 可以言治.는 지론을 가진 정조에게 예악의 정비는 국정 우선순위(優先順位)가 높은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조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응이 음률에 대한 지식이 깊음을 알고 한 권의 악서를 만들 것을 명하여 완성된 책이 『시악화성』이다.

이미 세손 시절에 빈객(賓客)으로 정조의 학문 수련에 도움을 준 서명응은 정조 즉위 이후에도 여전히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음악 부문에도 정조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시악화성』이 나오게 된 배경도 같은 맥락인데, 평소 음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정조가 틈틈이 율려를 공부하고 여러 학자의 설을 널리 참조하여 기록해 둔 후 서명응에게 책의 의례(義例)를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시악화성』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群書標記)」에 ‘어정서(御定書)’로 분류되어 있고, 정조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악화성』을 통해 정조와 서명응의 당대 음악 현실에 대한 인식은 물론 음악 이론 전반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표> 『시악화성』의 편목
책(冊) 권(卷) 편목(編目)
천(天) 권1(卷之一) 악제원류(樂制源流)
권2(卷之二) 악률본원(樂律本元)
권3(卷之三) 악현법상(樂懸法象)
지(地) 권4(卷之四) 악기도수(樂器度數)
권5(卷之五) 악경합선(樂經合旋)
권6(卷之六) 악경균조(樂經均調)
인(人) 권7(卷之七) 악가의보(樂歌擬譜)
권8(卷之八) 악주의보(樂奏擬譜)
권9(卷之九) 악무의보(樂舞擬譜)
권10(卷之十) 도량형보(度量衡譜)

『시악화성』은 표 ‘『시악화성』의 편목’에서 볼 수 있듯이 크게 천·지·인의 체제하에 10개의 편목(編目)으로 나뉘어 있다. ‘천(天)’편의 권1 ‘악제원류(樂制源流)’는 가장 앞부분에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적은 후, 태조로부터 영조대에 이르는 악제를 역사적으로 고증(考證)하면서 고제(古制)와 어긋난 부분에 대하여 주고받은 많은 논의들과 그 배경을 서술하였다. 특히 서명응과 정조가 가장 중요하게 평가하는 세종조의 악은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 ‘악제원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권2 ‘악률본원(樂律本元)’은 악률 이론에 관한 연구이다. 율을 정하는 원리를 비롯하여 율척(律尺)을 거서(秬黍)로 만드는 이유 등을 서술했고, 율려(律呂)를 구할 때 유가(儒家)와 역가(曆家)의 입장이 확연히 대립되어 있는 후기지설(候氣之說)과185)후기지설(候氣之說)은 절기(節氣)에 따라 음률을 정하는 법으로, 12율관을 특수하게 만든 율실(律室)의 12방위에 따라 방사선 모양으로 배열해 놓으면 일 년 12달의 매 절일에 각각의 해당하는 관이 하늘의 기운에 응한다는 설. 측경지설(測景之說) 모두 성인의 유법(遺法)이라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아울러 율관(律管)을 제조하는 법식 등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정률요결(定律要訣)·서척진수(黍尺眞數)·면멱적실(面冪積實)·후기측경(候氣測景)·제조법식(製造法式)·음률경위(音律經緯)·아속자보(雅俗字譜)·합선 정의(合旋正義) 등 아홉 가지 세목으로 나누어 악률에 관한 이론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권3 ‘악현법상(樂懸法象)’은 당대의 악현에 대해 여러 고증을 통한 비판을 하였다.

‘지(地)’편의 권4 ‘악기도수(樂器度數)’는 팔음(八音) 악기의 기원, 악기 제작법, 연주법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권5 ‘악경합선(樂經合旋)’은 “『주례』 「춘관」은 악주(樂奏)의 경(經)이고, 시 300편은 악가(樂歌)의 경”이라 하여 악경(樂經)만이 홀로 온전히 남아 있다고 밝힌 뒤, 이에 근거하여 제사지낼 때 옳은 용악(用樂)에 대해 논하였다. 권6 ‘악경균조(樂經均調)’에서는 『시경』의 국풍(國風)·소아(小雅)·대아(大雅)·주송(周頌)의 시에 곡조를 붙여 놓았으며 각 악조의 이론을 설명하였다.

‘인(人)’편의 권7 ‘악가의보(樂歌擬譜)’, 권8 ‘악주의보(樂奏擬譜)’, 권9 ‘악무의보(樂舞擬譜)’에는 제례때 연행되는 악·가·무의 악보를 비롯하여 문무·무무를 추는 법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였다. 권10 ‘도량형보(度量衡譜)’는 율려 제조의 기본 척도가 되는 도량형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삼대척제(三代尺制)인 하척(夏尺)·은척(殷尺)·주척(周尺)을 비롯하여 황명척제(皇明尺制)와 본조척제(本朝尺制) 등을 도설로 비교해 놓아 역대 척도를 대조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악화성』은 이전에 편찬한 어느 악서보다도 고증에 철저하였다. 이는 편찬자 서명응의 학문적 태도에 기인한다. 중앙의 핵심 관료이면서 국가 전례의 정비에 대해 막대한 책임을 지고 있던 서명응의 음악 관련 작업은 기본적으로 정조의 학문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정조 자신이 이미 당대 고증학(考證學)의 장점을 인정하였고, 이들이 취한 고증학적 태도는 음악의 이론적 정리 작업을 좀 더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진행하도록 하였다.

『시악화성』을 편찬한 의미가 정조와 서명응이 쓴 서문에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내용을 통해 정조와 서명응이 음악 부문을 개혁하면서 ‘고악(古樂)’ 회복 노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고악의 회복이라는 것은 고악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자는 상고(尙古) 또는 복고(復古)의 논리가 아니다. 이는 악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지닌 모습의 희구(希求)이며 명나라가 멸망한 후 유교 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조선 사회에서 악의 본지를 찾아야 한다는 노력이자 책임 의식이었다. 정조가 집권 초반에 『시악화성』을 편찬하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서는 예서와 함께 예악 정치 실현을 위한 실천 텍스트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예에 밝은 이를 찾는 일보다 악에 밝은 이를 찾는 일이 훨씬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악을 잘 아는 신하를 발굴하여 악서를 편찬하도록 하는 일은 역대 왕에게 부여된 일종의 과제와 같았다. 세종이 박연을 만난 일, 성종이 성현을 만난 일, 정조가 서명응을 만난 일은 중요한 악서가 나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고, 그 결과 『악학궤범』, 『동국문헌비고』 「악고」, 『시악화성』 같은 중요한 악서가 결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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