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5장 왕실 행사와 전례 음악
  • 4. 왕실 행사를 위한 악기 조성
  • 왕실 악기 제작 기관과 악기조성청의궤
송지원

조선시대의 궁중에서는 새 악기가 필요할 때 궐내에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악기를 제작하였고, 제작한 이후에는 각각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악기 제작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이러한 제작 과정은 의궤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악기 제작이 소규모로 이루어지거나 간단한 개수(改修) 작업만 이루질 때는 일일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악기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비교적 큰 규모의 악기 조성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비교적 큰 규모의 악기 조성이 이루어질 때는 임시 기구를 설치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악기도감(樂器都監) 또는 악기감조색(樂器監造色)이라는 기 구를 두어 악기를 조성하였고, 1682년(숙종 8) 이후에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이라는 기구를 두어 악기를 제작하였다. 또 합금(合金)을 해서 만드는 종이나 편종 등의 제작을 위해서는 별도로 주종소(鑄鐘所)를 설치하여 악기를 제작하였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의궤 가운데 악기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의궤는 모두 4종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1624년(인조 2) 3월부터 11월에 걸쳐 제기와 악기를 비롯하여 제복(祭服)·의장(儀仗) 등을 만든 과정을 기록한 『제기악기도감의궤(祭器樂器都監儀軌)』(규 13734)이고, 그 다음이 1744년(영조 20) 10월 인정전의 화재로 소실된 악기를 조성하는 일을 기록한 1745년의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仁政殿樂器造成廳儀軌)』(규 14264)이며, 그 이후의 것이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건립하고 제향을 올릴 때 연주할 경모궁 악기 조성 내용을 기록한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景慕宮樂器造成廳儀軌)』(규 14265)이다. 악기조성청의궤로 가장 뒤의 것은 1803년(순조 3) 11월 사직서(社稷署)의 악기고(樂器庫) 화재로 소실된 악기를 조성하는 경위를 기록한 1804년(순조 4)의 『사직악기조성청의궤(社稷樂器造成廳儀軌)』(규 142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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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악기도감의궤』
『제기악기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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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인조대의 『제기악기도감의궤』는 악기 제작 내용만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후 유실되거나 손상된 악기의 복구 실태와 제작 과정을 잘 알려 주는 자료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조대의 『인정전악기조성청의궤』와 순조대의 『사직악기조성청의궤』는 궁궐에서 화재로 불에 탄 악기를 제작하는 과정과 제작 내용을 보여 주며, 정조대의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는 새 롭게 제정된 제례에 필요한 제례악 연주를 위한 악기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의미를 각각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18세기 이전에는 악기조성청이 아니라 악기도감이라는 기구 명칭을 사용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악기도감 또는 악기감조색이라는 기구를 두어 악기를 조성하였고, 1682년(숙종 8) 이후에는 악기조성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앞서 살펴본 4종의 악기 제작 관련 의궤에서 이미 악기 제작 기구 명칭의 시기별 변화를 그대로 볼 수 있다. 악기감조색이라는 명칭은 세종대에 잠시 사용하였을 뿐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 ‘악기감조색’이라는 명칭은 1430년(세종 12) 9월 21일에 박연이 올린 상소문에 처음 보인다. 이 기사는 박연의 상소문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헌가의 악기는 종·경을 제외하고는 금·슬이 각각 6개, 축·어가 각각 1개, 훈·부·지·적·소·생·우·관·약이 각각 10부이며, 북의 제도에 있어서는 옛 그림을 상고하오니, 조회(朝會)와 사의(射儀)에 모두 건고(建鼓)를 사용하였는데, 그 장식과 위의(威儀)가 제악(祭樂)과 유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악기들은 모두 미리 제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악기감조색을 설치하여 시기에 미칠 수 있게 제조하도록 하소서.”190)『세종실록』 권49, 세종 12년 9월 기미(21일).

이 기사를 통해 볼 때 악기 제작을 위한 기구 명칭을 악기감조색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같은 해 12월 27일 기사에도191)『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2월 계사(27일). 나오는데, 『조선 왕조 실록』을 검색하면 이처럼 세종대에 단 두 차례 나올 뿐이다.

악기감조색이라는 기구에서 만든 의궤로 현재 전해오는 것은 없다. 따라서 현재 규장각에 남아 있는 4종의 악기 제작 관련 의궤의 제목에서도 악기도감과 악기조성청이라는 두 가지 명칭만 볼 수 있다. 요컨대 악기 제작 기구는 17세기까지 악기감조색 혹은 악기도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8세기 이후부터 악기조성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왕실에서는 각각의 행사를 위한 다양한 악기를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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