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1. 유교의 수용과 유교 의식의 대두
권오영

아득한 옛날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선교(仙敎)라는 고유의 신앙이 있었다. 그 고유 신앙은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많이 퇴색하였지만, 상호 교류를 통해 이질성을 극복하면서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형성하고 발전하여 왔다. 특히 불교를 수용하기 전까지는 고유 신앙과 유교가 상보적(相補的)으로 발전하였다. 신라 말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은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이른바 선교(仙敎)가 있었고 그 교는 사실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를 포함하는 것이라고1)『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흥왕(眞興王). 하였다. 그렇다면 선교라고 하는 우리의 고유 신앙은 오랜 옛날부터 유·불·도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사유와 삶에 배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에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창시한 이후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쟁명(爭鳴)하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유가(儒家)도 제자백가 가운데 한 유파(流派)에 불과하였다. 유가는 현실에 깊이 간여하다 보니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의 지적처럼 “수고롭되 공(功)이 적고 널리 배우되 요약이 부족하다.”는2)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특징이 있었다. 그러나 유가는 효제(孝悌)를 실천 강령으로 하며 인간관계를 중시하여 어느 시대에서나 주목받을 수 있 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통치하던 진(秦)나라 때는 법가가 정치를 주도하여 유가는 크게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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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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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유가는 한(漢)나라 때부터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은 애당초 유학자들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였으나 나중에는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 가서 공자의 사당에 몸소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그의 증손인 무제(武帝)는 유학을 새롭게 주목하면서 공자를 본격적으로 높이 받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나라에서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고 국가의 정식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다.

고대에는 인(仁)과 예(禮)를 근본으로 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忠), 부모에 대한 효(孝)라는 유교적 사유가 삶을 지배하였다. 중국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 온 우리나라는 이미 부여(夫餘)에서 음식을 담는 그릇은 모두 조두(俎豆, 나무로 만든 제기)를 사용하고 회동(會同) 등에서 유교적인 예를 행하고 있었다.3)『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이를 말해 주듯 중국의 옛 문헌에는 동이(東夷)에 속한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君子不死之國)’라고 일컬었다.4)『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 10편(篇) 하(下), 이(夷).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은 우리나라가 오랜 유교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하였다.

동이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豆)와 변(籩)을 쓰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5)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40, 동문(同文), 유학(儒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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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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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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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오랜 유교적 전통을 지닌 나라지만 유교가 언제 수용되었는지는 사료(史料)가 부족하여 잘 알 수 없다. 흔히 은(殷)나라 말 주(周)나라 초에 기자가 고조선으로 와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8조 법금(八條法禁)을 시행하고부터 우리나라 유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아 왔다. 오늘날 기자가 고조선으로 왔다는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많지 않지만, 기자를 우리의 토착 민족으로 이해하여 유교를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조선시대나 삼한시대에 이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유교적 사유와 삶의 양태가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유교가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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