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2. 삼국시대, 충·효·정결의 유교 윤리
  • 백제
권오영

백제는 375년(근초고왕 30)에 박사 고흥(高興)이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였고, 박사 왕인(王仁)이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일본에 전 해 주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513년(무령왕 13)과 516년에는 단양이(段陽爾)라는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하였고, 541년(성왕 19)에 양(梁)나라에 모시박사(毛詩博士)를 청하였으며, 진(陳)나라에 강례박사(講禮博士)를 청하기도 하였다.

한편 백제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며 아울러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 빼어난 자는 능숙하게 문장을 짓고 또 음양오행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혼인의 예법은 대개 중국과 같고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었다.7)『주서』 권49, 열전, 이역 상(上), 백제(百濟). 백제에는 충효와 정결(貞潔)을 중시하는 유교적 사유와 삶이 어느 정도 보급되어 있었다. 효에 대한 백제인의 사유는 기원전 18년(온조왕 원년)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우고 이후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낸 것이나 해마다 네 차례 시조 구이(仇台)의 사당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백제인의 효에 대한 생각은 의자왕(641∼660)이 왕자 시절에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해동 증자(海東曾子)’로 불렸던 사실에서8)『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상 ; 『당서(唐書)』 권220, 열전, 동이, 백제. 백제에 효의 윤리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미처해도(彌妻偕逃)
미처해도(彌妻偕逃)
팝업창 닫기

백제에서 충에 대한 유교 윤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성충(成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극언(極言)으로 간쟁(諫爭)하다가 옥에 갇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한마디 말씀을 드리고 죽겠습니다.”라고 하여 충을 다하였다.9)『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6, 의자왕(義慈王) 16년. 그런가 하면 계백(階伯)은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몸소 충을 실천하였다.10)『삼국사기』 권47, 열전 7, 계백(階伯).

중국의 역사서에 고대 우리나라 여성들은 정신(貞信)하여 음탕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1)『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도미(都彌)의 부인은 정결을 매우 소중하게 여겨 개로왕(455∼475)의 수청 요구를 지혜롭게 피하여 자신의 정결을 지켰다.12)『삼국사기』 권48, 열전8, 도미(都彌). 사료에는 개루왕(蓋婁王)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백제 제4대왕인 개루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21대왕인 근개루왕(近蓋婁王), 즉 개로왕을 가리키는 것 같다. 백제 사회는 비록 불교가 지배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유교 윤리에 가까운 충과 효, 신(信)과 용(勇), 정결(貞潔)에 대한 관념이 있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