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4. 통일신라, 유교 지식인의 삶
권오영

신라는 640년(선덕 여왕 9)부터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651년(진덕 여왕 5) 김인문 등이 숙위 학생으로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더욱 유교 문화에 대한 깊은 학습이 이루어졌다. 견당(遣唐) 유학생들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라 사회에서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682년(신문왕 2)에 신문왕은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687년(신문왕 7)에는 오묘제(五廟制)가 확립되었다.

714년(성덕왕 13) 당나라에 들어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은 719년(성덕왕 18)에 공자, 십철(十哲), 72제자의 상(像)을 가지고 돌아와 국학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728년(성덕왕 27)에 왕의 동생 김사종(金嗣宗)은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743년(경덕왕 2)에는 당 현종으로부터 『어주효경(御注孝經)』을 전해 받았고 4년 후인 747년(경덕왕 6)에는 국학을 확충하고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었다.

국학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공통 과목으로 가르쳤는데 그간 충과 효를 중시하던 유교는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仁)과 효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우수한 인 재를 발탁하여 선발하였다. 세 등급으로 이루어진 시험 과목은 하품(下品)은 『곡례(曲禮)』·『효경』, 중품(中品)은 『곡례』·『논어』·『효경』, 상품(上品)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예기』·『문선』·『논어』·『효경』이었고,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사기』, 『한서』, 『후한서』),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널리 통한 자는 높은 자리에 등용하였다. 여기서 『곡례』와 『효경』이 상중하 삼품에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것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유교의 예와 효를 그만큼 중시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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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
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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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국학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다만 궁전(弓箭)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다가 이제 인재 선발 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다.32)『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元聖王) 4년 봄. 그리하여 신라에서도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유교에 의해 훈련된 인재가 국가의 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대인의 상무적인 유교적 삶의 문화는 문(文)을 숭상하는 유교적 삶과 사유의 양식으로 전환되었다.

유교 교육의 진작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강수(强首), 설총(薛聰, 655∼?), 최치원 같은 걸출한 유학자가 출현하였다. 강수는 삼국 통일 초기에 유학의 단서를 연 인물이었다. 내마(柰麻) 벼슬을 지낸 아버지 석체(昔諦) 가 나이 어린 강수의 포부를 알아보려고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유도(儒道)를 배우겠느냐?”라고 묻자 강수는 “제가 듣건대 불교는 세속을 떠난 교라고 합니다. 저는 이 세상 사람이온데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답하였다.33)『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强首).

강수는 불교가 지배적인 시대에 태어났으나 과감하게 불교의 세속을 벗어난 삶을 비판하고 현세의 인간 세계를 중시하는 유교적 삶을 선택하였다. 그가 유학을 배우겠다고 한 것은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六頭品) 이하의 귀족으로 편입된 뒤 유학을 통해 새롭게 관료로 진출하려는 자기 집안의 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강수는 『효경』·『곡례』·『이아(爾雅)』·『문선』 등을 학습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깊은 식견으로, 당시 당나라에서 신라에 보내온 조서(詔書)의 내용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잘 해독하였다. 그래서 이후 왕은 강수에게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을 주로 짓게 하였다.

강수는 문장에 뛰어나 당나라는 물론 고구려·백제 등에서 보내온 외교 문서를 해석하고 다른 나라에 보내는 국서의 작성을 홀로 담당하였다. 특히 강수가 활동하던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국력을 경주하던 때이므로 외교 문서의 작성을 통한 대당 외교는 김유신의 전공(戰功)에 못지않은 일이었다. 문무왕은 강수가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의 원병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이룩한 것은 그 공이 결코 김유신의 무공에 뒤지지 않는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하였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先王,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 한편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34)『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强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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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탑지(陵只塔址)
능지탑지(陵只塔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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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강수에게는 부부간의 유교적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기 집안보다 신분이 훨씬 낮은 대장장이 집 딸과 야합(野合)하여 정의(情誼)가 아주 두터웠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와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그는 조강치저(糟糠之妻)를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요,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들으니 옛사람의 말에 “가난을 함께하였던 아내는 내쫓을 수 없고, 빈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천한 신분의 아내라고 하여 버릴 수는 없습니다.35)『삼국사기』 권46, 열전6, 강수.

강수는 골품제가 지배하는 신분 사회인 당시에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부인을 택하였으나 출세 후 부인을 버리지 않고 해로(偕老)함으로써 새로운 부부간의 윤리관을 제시한 유학자였다.

우리나라 유학자 중에서 최초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설총은 승 려 원효(元曉)의 아들인데, 신문왕대 최고의 유학자로 국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어느 날 신문왕은 한가한 틈을 타서 설총을 불러 들여 “오늘은 그동안 지루하게 내리던 비도 개고 훈훈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고상한 담론과 유익한 해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이 좋겠다. 그대는 특이한 얘기가 있으면 나에게 들려 달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설총은 모란과 할미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유교의 정치 윤리를 신문왕에게 제시하였다.36)『삼국사기』 권46, 열전6, 설총(薛聰) ; 『동문선(東文選)』 권52, 주의(奏議)에도 ‘풍왕서(諷王書)’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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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 서원(西岳書院)
서악 서원(西岳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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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의 이러한 유교적 견해는 ‘화왕계(花王戒)’라는 작품으로 정리되었는데, 임금의 도를 밝히는 교훈적 작품으로 정치에 반영되었다. 이 작품은 『동문선(東文選)』에 ‘풍왕서(諷王書)’로 수록되어 조선시대에도 읽혔다. 설총은 맹가(孟軻, 맹자)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머리가 희도록 미관말직(微官末職)에 머물러 있었다는 예를 들어 설명하여 화왕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 잘못을 풍간(諷諫)하였다. 설총은 1022년(고려 현종 13) 정월에 홍유후(弘儒侯)로 추증(追贈)되었고, 우리나라 유학자 중에서 맨 먼저 문묘에 종향(從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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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초상
최치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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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에 시작된 당나라 유학은 통일 과정에서 대당 관계가 악화되면서 뜸해졌다. 그러다가 703년(성덕왕 2)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국교가 다시 열리면서 유학생들은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았고, 다시 유교 문화를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 설치와 함께 6두품 계열 학자의 당나라 유학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下代)에는 6두품 자제 가운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출세한 이가 많았다. 그들 중에 특히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신라로 돌아와 신라 최고의 지성(知性)으로 활동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이요,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는 유·불·선 삼교에 두루 통한 학자였지만 항상 유(儒)로 자처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그 교(敎)를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중생을 접촉하여 교화를 한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취지이며,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이다.”라고37)『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하였다.

최치원은 “무릇 도는 사람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마다 차이가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법이나 유학을 배우는 것은 필연적이다.”라고38)최치원(崔致遠),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문집 권2, 비(碑), 「진감화상비명(眞監和尙碑銘)」 123쪽. 하였다. 최치원의 유교적 삶과 사유는 “도는 사람 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표현에서 보듯 일상성에 있었고, “사람은 나라마다 차이가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다른 나라 사람과 사상을 포용하는 사유의 개방성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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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탁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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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인심(仁心)이 곧 부처이고 부처의 눈이 능인(能仁)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은 유교의 핵심 개념이고 석가모니의 또 다른 이름인 능인적묵(能仁寂默)의 능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최치원의 유·불·도 삼교를 회통(會通)한 개방적 사유는 어쩌면 당시 사상의 일반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나 이러한 사상적 지향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였다.

최치원은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홍류동의 물소리로 속세에서 이는 시비의 소리를 막아 버리고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 뒤 최치원의 제자들은 고려 개국 후 국정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고려 현종은 최치원이 고려 건국의 왕업을 몰래 도왔으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1022년(현종 14)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종향하도록 명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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