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5. 고려 전기, 치국 이념으로서의 유교
권오영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의 유교 문화는 특히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벗 사이의 믿음, 여성의 정결을 강조하였다.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으로 일컬어지는 발해(渤海)에서도 유교 문화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곧 발해의 관부(官府)에 충·인·의·지·예·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유교를 주요 정치 이념으로 표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국가를 다스리는 인재의 확충이 크게 요구되었고 충효의 유교 윤리가 필요하였다. 태조대에는 아직 유교의 예를 정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958년(광종 9)에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여 유교 경전과 제술(製述)에 대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발탁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성종대에는 비로소 원구단(圜丘壇)에 제사를 지내고 적전(籍田)을 경작하였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웠다.39)『고려사(高麗史)』 권59, 지(志)13, 예(禮)1.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치국(治國)의 이념으로 유교를 적극적으로 정치에 활용할 것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다. 치국의 이념으로 제시된 유교는 광종대의 과거제 실시와 현종대의 설총·최치원의 문묘 종향 등을 거치면서 발전하여 나갔다. 고려는 유교 경전과 당·송의 예제(禮制)를 수용하여 예제를 정비하여 나갔다. 성종은 오복(五服) 제도를 도입하였고 소상(小 祥)·대상(大祥)·담사(禫祀) 등과 삭망제(朔望祭)가 새로운 예제로 제시되었다.40)『고려사』 권59, 지18, 예6, 오복 제도(五服制度). 그리고 988년(성종 7) 12월에 처음으로 오묘를 정하였고 이듬해 4월에 태묘(太廟)를 짓기 시작하여 992년(성종 11) 11월에 완성하였다. 또 고려는 국가 의례로 원구(圜丘)에서 기곡(祈穀)의 예를 행하였고,41)『고려사』 권59, 지13, 예1. 태묘 등의 제사에서 당나라의 예제와 대등한 의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유교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확대보기
개성 성균관 전경
개성 성균관 전경
팝업창 닫기

당시 최승로는 성종에게 유교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믿는 일이 비록 선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왕(帝王)과 사서인(士庶人)이 불법을 위하는 공덕은 실로 같지 않습니다. 서민이 불법의 공덕을 위하여 노고하고 허비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요 재물이니 해로움이 다른 데 미치지는 않습니다만, 제왕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저들의 재물을 허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양 무제(梁武帝)는 존귀한 천자의 신분으로 필부(匹夫)의 선한 일을 닦았는데, 사람들이 그르게 여겼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불교를 높이는 자는 단지 내생의 인과(因果)만을 위하여 덕을 심을 뿐이므로 현재의 응보(應報)에는 이익이 있음이 적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이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개인이 수양하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내생을 위하는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매우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42)『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崔承老).

최승로는 불교를 행하는 것은 개인이 수양하는 근본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은 불교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대신 유교를 행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하여 유교를 과감하게 치국의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불교시대에는 개인적 차원의 수신은 불교의 몫이었고 유교는 치국의 근본이념이었으나, 조선 왕조에 이르러 수신과 치국이 모두 유교의 담당이 되었다.

유교는 인(仁)을 가장 중시하는데 그 인을 실천하는 근본은 바로 효제(孝悌)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효우전(孝友傳)이 실려 있는데, 고려 500년 동안에 효성이나 우애가 뛰어나 역사책에 특기(特記)되어 있거나 정표(旌表)를 받은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다.43)『고려사』 권121, 열전34, 효우(孝友). 이러한 효우에 대한 정치적 지원은 이미 성종대에 시작되었다.

969년(성종 9) 9월에 성종은 효를 강조하는 조서(詔書)를 전국에 내려 “무릇 국가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힘써야 하는데 근본을 힘쓰는 것은 효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 효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근본적인 일이었고 만사의 기강(紀綱)이요 모든 선(善)의 중심이라고 하였다.44)『고려사』 권3, 세가(世家)3, 성종 9년 9월 병자(丙子). 그리하여 성종은 각 도(道)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가르침을 내려 굶 주려 흩어지는 노약자들을 구휼(救恤)하고, 궁핍한 홀아비와 고아를 구제하며, 효자(孝子)·순손(順孫)과 의부(義夫)·절부(節婦)를 찾아 보고하게 하였다.45)이후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 나이가 80세 이상 된 남녀, 효자, 순손, 의부, 절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효행뿐만 아니라 의부와 절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의부에 대한 사료는 조선 단종 때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사』 권8, 세가8, 문종 기해 13년(1059) 가을 8월 계유에 편전에서 80세 이상의 연로자들인 공부 상서 홍계(洪楷)와 상장군 하흥휴(河興休)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화주(花酒)를 권하면서 해가 지도록 즐겼으며, 겸하여 의복을 주었다. 또한 구정 낭하(毬庭廊下)에서는 평민 연로자, 중한 질병에 걸린 남녀, 효자, 순손, 의부, 절부 등 1,280명에게 주연을 배설하여 주었으며, 같은 날 서경(西京, 평양)을 비롯한 모든 주군(州郡)에서도 주연을 베풀었다. 그간 통일신라시대까지 불교에서 강조되던 효선(孝善)은 이제 유교의 효제와 효우의 윤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46)당시 효행이 뛰어난 인물로 우선 전주(全州) 구례현(求禮縣)의 백성 손순흥(孫順興)이 뽑혔다. 그는 어머니가 병사하자 화상(畵像)을 그려서 제사를 받들고 사흘에 한 번씩 무덤에 가서 살아 있을 때와 같이 봉양하였다. 그리고 운제현(雲梯縣) 기불역(祇弗驛)의 백성 차달(車達) 형제 세 사람은 함께 노모를 봉양하는데, 차달은 아내가 시어머니를 정성껏 섬기지 않았다고 하여 곧 버리고 두 동생도 혼인하지 않은 채 마음을 같이하여 효성으로 모셨다고 하였다. 또 서도(西都) 모란리(牡丹里)의 박광렴(朴光廉)은 어머니가 돌아간 지 이레에 홀연히 고목(枯木)을 보니 꼭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으므로 집으로 와서 예의를 다하여 봉양하였다. 그리고 남해(南海) 낭산도(狼山島) 백성 능선(能宣)의 딸 함부(咸富)는 아버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침실에 빈소를 차리기를 5개월이나 하고 음식을 바치기를 평상과 다름없이 하였고, 경주(慶州) 연일현(延日縣)에 사는 백성 정강준(鄭康俊)의 딸 자이(字伊)와 개성 송흥방(宋興坊)에 사는 최 씨의 딸은 일찍 과부가 되었으나 재가(再嫁)하지 않고 시부모를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 아이들을 잘 길렀다. 성종은 함부 등 남녀 7명에게는 그들이 사는 마을에 정표(旌表)하게 하고 부역(賦役)을 면제하게 하였다. 차달 형제 등 4명은 역(驛)과 섬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현에 편입하도록 해주고, 순흥 등 5명에게는 벼슬을 주어 효도를 드러나게 하였다.

성종은 “임금은 만민의 원수(元首)요, 만민은 임금의 복심(腹心)이니, 백성들이 선을 행하면 이는 자기의 복이요, 악을 행하면 또한 자기의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는 행실을 나타내어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마음을 표시하니, 재야(在野)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렇게 효를 생각함에 부지런하거늘, 벼슬을 하는 군자야 어찌 선조 받들기를 게을리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가문에 효자가 되면 반드시 나라에 충신이 될 것이니, 무릇 모든 신민(臣民)은 자기의 말을 되새기라.”고 하였다.47)『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9월 병자. 이러한 성종의 말에서 가정에서의 효를 나라에 대한 충으로 승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고려의 유교 문화는 현종·문종을 거쳐 숙종·예종·인종·의종 때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채충순(蔡忠順, ?∼1036)은 현종이 요(堯)임금의 지인(至仁)과 순(舜)임금의 대효(大孝)를 본받아 인효(仁孝)에 바탕을 둔 유교 이념을 잘 실천하였다고 하였다.48)「현화사비(玄化寺碑)」, 조선 총독부 편, 『조선 금석 총람(朝鮮金石總覽)』 상(上), 아세아 문화사 영인, 1976.

옛날의 성군이여 / 古之聖君

요순이 바로 그 사람이네 / 堯舜其人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 道德理國

인효로 백성을 교화하였네 / 仁孝化民

순임금은 효로써 다스렸고 / 舜理以孝

요임금은 인으로써 다스렸네 / 堯理以仁

……

오직 우리 현명하신 임금께서 / 惟我明主

정치를 하심에 옛 것을 스승 삼아 / 爲政師古

요임금을 이어 풍속을 이루셨고 / 繼堯撫俗

순임금을 법받아 다스리셨네 / 法舜御宇

고려 전기 불교 문화가 지배적이던 시대에 채충순은 현화사비(玄化寺碑)에 바로 유교 이념의 핵심인 인과 효를 명시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이념으로 내걸었다.

확대보기
현화사비
현화사비
팝업창 닫기

한편 1048년(문종 2)에는 매 계절의 중월(2·5·8·11월)에 제사를 지내는 사중시제(四仲時祭)를 위하여 관리에게 이틀의 휴가를 주는 제도를 정하였다.49)『고려사』 권63, 지17, 예5, 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1390년(공양왕 2) 2월 판(判)에 대부(大夫) 이상은 3세(世), 6품 이상은 2세, 7품 이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부모를 제사 지내고 모두 가묘(家廟)를 세우게 하였다. 문종 이후 유교적 효의 실천은 당시 승려들의 언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문종의 아들인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오형(五刑)이 3,000가지이지만 죄는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육도(六度)에 돌아가는 것이 8만이지만 복은 효를 행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라고50)의천(義天),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3, 강난분경발사(講蘭盆經發辭) : 『한국 불교 전서(韓國佛敎全書)』 4, 동국 대학교 출판부, 1982, 530쪽.. 하여 유교적 효와 불교적 효를 동일하게 이해하였다.

문종대에는 최충(崔沖, 984∼1068)의 9재 학당(九齋學堂)을 비롯하여 유교의 문풍이 일어나고, 12공도(十二公徒)가 활동하여 유교는 새로운 기운을 진작하고 있었다. 최충은 성종대부터 이미 실시되어 오던 『설원(說苑)』의 ‘육정육사(六正六邪)’를 다시 제기하여 유교 정치에 입각한 군신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그리고 ‘자사 육조(刺史六條)’를 통하여 고려의 모든 관료에게 관료로서의 유교 정치 이념을 갖게 하였다. 이 ‘자사 육조’는 지방 관료의 복무 지침으 로 조선시대 ‘수령 칠사(守令七事)’에 앞서 유교 정치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최충은 이미 성종대에 표방된 유교 정치 이념을 계승하여 당시 사회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확대보기
대각 국사 의천 진영
대각 국사 의천 진영
팝업창 닫기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널리 알려진 최충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 9재(九齋)를 설립하여 학도(學徒)를 가르쳤다. 과거를 보려는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그의 학도로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 상례(常例)로 되었으며,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 학습을 실시하였는데 학도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학력이 우수하면서도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선발하여 교도(敎導)로 삼고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 『고려사』에 동방 학교의 흥함은 대개 최충부터 시작되었다는51)『고려사』 권95, 열전8, 최충(崔沖). 표현에서 보듯 그는 뛰어난 유교 교육자였다.

또 9재에서는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실시하여 성적에 따라 우수한 시(詩)는 방(榜)을 붙이는 동시에 성적순으로 호명하여 좌석을 정한 후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어 흥을 돋우었다. 이때 모든 행동에 예절이 있었고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가 정연하였으며, 서로 시를 읊으며 그날을 즐겁게 보내고 해가 저물면 일동이 모두 낙생영(洛生詠, 시 낭송의 일종)을 합창하면서 파하였다.

최충의 9재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구경 삼사를 중심으로 과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지식 교육 위주였다. 그러나 사장(詞章) 교육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구경 중심의 훈고학(訓詁學)과 사장학(詞章學)이 고려 전기 지식인의 유교적 삶과 사유를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