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1장 유교적 사유와 삶의 형성
  • 6. 고려 중기, 유교 교육의 강화
권오영

예종대에는 관학(官學)이 발달하여 강경(講經)과 사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 예제를 관장할 관청인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그 뒤 의종대에는 최윤의(崔允儀, 1102∼1162)가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하여 고려의 유교적 예제를 정비하여 나갔다.52)『고려사』 권59, 지13.

그러나 의종대에는 사장의 학풍이 지나쳐 문약(文弱)으로 흘렀다. 이러한 사장학의 발달은 김연(金緣)이 지은 ‘청연각기(淸讌閣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왕께서는 총명하시며 깊고 아름다우시며 진실하고 빛나는 덕을 가지고 유학을 숭상하시어 중국의 문화를 즐겨 사모하셨다. 그러므로 대궐 옆이며 영영서전(迎英書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각(寶文閣)과 청연각(淸讌閣)이란 두 건물을 세우셨다. 한 곳에는 송(宋)나라 황제가 지은 조칙(詔勅)과 글씨, 그림을 받들어 걸어 놓고 교훈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절하고 몸가짐을 엄숙히 한 뒤에 이를 쳐다보았다. 한 곳에는 주공(周公)·공자(孔子)·맹자(孟子)·양웅(揚雄) 이후 고금의 서적을 모아 놓고 날마다 연로한 스승과 공부가 높은 학자와 더불어 토론하시며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시어 마음에 간직하고 공부하며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한 건물 안에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와 성명도덕(性命道德)의 이치가 사방에 충만하였다.53)『동문선(東文選)』 권64, 기(記), 「청연각기(淸讌閣記)」.

비록 청연각이라는 제한된 공간이기는 하지만 삼강오상과 성명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가득 찼다는 표현은 불교 사회였던 고려에서 유교 윤리와 성(性)과 명(命), 도(道)와 덕(德)의 철학적 담론이 어느 정도 학문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서긍은 고려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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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각지의 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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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청연각(淸讌閣)이 있는데 역시 경사자집(經史子集) 사부(四部)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학교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計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의 위의(威儀)가 우아하고 문 채(文彩)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해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에게 글을 배운다.54)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동문, 유학.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목격한 당시 고려 사회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경전에 대한 학습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민간 마을에 학당이 있어 백성들의 자제가 스승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더 장성한 뒤에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사찰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까지도 각 고을의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는 표현은 불교 사회에서 유교 경전에 대한 학습도 꽤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초부터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 사당)를 국자감 안에 창건하고 관원을 두고 스승을 배치하였으며, 1091년(선종 8) 9월에는 예부에서 국학의 벽 위에 72현(賢)의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위차(位次)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1101년(숙종 6) 4월에는 국자감에서 문선왕묘의 좌랑(左廊)과 우랑(右廊)에 새로 61자(子)와 21현을 그려 종사(從祀)시키자고 건의하였다.55)『고려사』 권62, 지16, 예4, 문선왕묘(文宣王廟). 1114년(예종 9) 8월에 예종은 국학에 나아가 공자에게 술을 올리고 강당에 나아갔다. 이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박승중(朴昇中)이 강설을 하자 백관과 생원 700여 명이 참여하였고,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내리자 각자 화답하여 시를 지어 올렸다. 1116년(예종 11) 7월에는 최치원에게 내사령을 추증하고 문선왕 묘정에 종사하였다. 예종은 유교 교육에 뜻을 두고 관계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학교를 많이 세우고 유학(儒學)에 60명과 무학(武學)에 17명을 배치하였고, 근신(近臣)에게 그 사무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유명한 유학자를 뽑아서 학관(學官)과 박사를 삼아 경서의 뜻을 강론하며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였다.

이같이 예종대에는 유교 학술이 크게 부흥하였다. 최충의 9재로 사학(私學)이 크게 일어나자 상대적으로 관학(官學)이 위축되었는데, 1109년(예종 4) 7월 예종은 국학에 7재를 두었다. 곧, 주역과(周易科)는 이택(麗澤), 상서과(尙書科)는 대빙(待聘), 모시과(毛詩科)는 경덕(經德), 주례과(周禮科)는 구인(求仁), 대례과(戴禮科)는 복응(服膺), 춘추과(春秋科)는 양정(養正), 무학과(武學科)는 강예(講藝)였다.

한편 인종대에 국자감, 대학, 사문학(四門學)에는 모두 박사와 조교를 두되, 반드시 경서의 지식이 풍부하고 덕행이 높아서 능히 스승이 될 만한 자를 택하고, 경서를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되 한 경서를 가르칠 때마다 마친 뒤에 반드시 강(講)을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강에 통하지 못하면 다른 과목으로 바꿀 수 없게 하고 연말에 강의한 분량을 계산하여 박사와 조교의 성적 등급을 차례로 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서로는 『주역』, 『상서』, 『주례』, 『예기』, 『모시』,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각각 한 가지 공부하고 그 밖에 『효경』과 『논어』를 반드시 함께 학습하게 하였다. 학생들의 수업 연한에서 『효경』·『논어』는 아울러 1년, 『상서』·『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은 각각 2년 반, 『주역』·『모시』·『주례』·『의례(儀禮)』는 각각 2년, 『예기』·『춘추좌씨전』은 각각 3년으로 하되 어느 경우든 모두 먼저 『효경』과 『논어』를 읽은 다음에 여러 경서와 산술과 시무책(時務策)을 학습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가가 있으면 글씨를 하루에 한 장씩 쓰게 하였으며, 아울러 『국어(國語)』, 『설문(說文)』, 『자림(字林)』, 『삼창(三倉)』, 『이아(爾雅)』를 학습하게 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유학 교육은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1127년(인종 5) 3월에 모든 주(州)에 학교를 세워 교육의 길이 넓어졌다. 그리고 1130년(인종 8) 6월에 국학에서는 근년 이래에 명경(明經)의 학문이 점차 쇠퇴하니 마땅히 30명 이하의 학생을 뽑아서 입학시키고 교육하되 아울러 교도관(敎導官)으로서 참상관(參上官)과 참외관(參外官) 각 1명을 배치하여 학업을 장 려할 것을 제의하였다.

1133년(인종 11) 1월에는 무학(武學)이 점차 성해진다면 앞으로 문학(文學)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과 대립하여 불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니 아주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이미 과거에 급제한 자는 문사와 같이 일체로 등용하되 무학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와 무학재(武學齋)의 칭호는 모두 폐지한다고 하였다. 인종대에 무학재가 폐지되면서 문치(文治)의 극성을 이루자 무신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무신 정권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유교는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1136년(인종 14) 7월에 국학에 처음으로 양현고(養賢庫)를 두고 인재를 양성하게 하였다.

인종 때 효에 대한 권면(勸勉)은 1134년(인종 12) 3월에 『효경』과 『논어』를 항간(巷間)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준 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1144년(인종 22) 10월에 60세 이상의 남녀 노인들과 효자, 순손, 의부, 절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중환자, 폐질자에게 왕이 친히 음식을 먹이고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56)『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갑자 22년(1144) 갑오.

고려시대 유교 문화에 대한 구체적 사례는 『고려사』의 충의(忠義), 양리(良吏), 효우(孝友), 열녀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가 비록 불교 국가였지만 치국의 이념으로서의 유교 윤리인 충효는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부인의 정절 역시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유교 윤리는 유교의 일반적 성향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고려 예제에 있어 ‘노인사설의(老人賜設儀)’에 따르면 노인·효자·순손·절부에게 포상하였다. 특히 양로(養老) 행사라고 할 수 있는 ‘노인사설의’는 왕이 80세 이상의 재신(宰臣)과 추밀(樞密), 문무 3품관(文武三品官) 및 명부(命婦)의 노인들, 문무 3품관 이하와 효자·순손으로 관품이 있는 자나 없는 자가 모두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에게는 국왕이 술과 음식과 과일을 내려 주었고 꽃을 주는 의식(宣花)도 있었다. 그리고 이 연회에는 음악이 연주되었고 무도(舞蹈)가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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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입강(烈女入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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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려시대에도 이미 양로 행사에서 노인은 국왕에게 절을 하고 한 번 앉아서 두 번 몸을 굽히기만 하는 ‘일좌재지(一坐再至)’의 예를 행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 양로 행사의 전통은 조선시대의 양로연의(養老宴儀)로 계승되었다.57)『고려사』 권68, 지22, 예10, 가례(嘉禮), 노인사설의(老人賜設儀). 고려시대 양로 행사는 1007년(목종 10) 7월에 목종이 구정(毬庭)에 나아가 민간인 남녀 80세 이상과 독질(篤疾, 위독한 병)·폐질(廢疾, 불치병) 환자 635명에게 술, 음식, 포(布), 면(帛), 차(茶), 약(藥)을 차등 있게 나누어 준 것을 시작으로 1101년(숙종 6) 3월 국로(國老)에게 연향(宴饗)을 베풀었고, 이듬해 7월에는 숙종이 서경(西京)에 있었는데 예부(禮部)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여 대궐 뜰에서 80세 이상의 남녀에게 사설(賜設)을 하고 태자에게 명하여 술과 음식을 권하게 하였다. 1208년(희종 4) 10월에 국로와 서로(庶老), 효자와 순손, 절부와 의부에게 연향을 베풀었고 또 환과고독(鰥寡孤獨), 독질·폐질 환자에게 차등 있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주부군현(州府郡縣)에도 이 예(例)에 따라 향례(饗禮)를 실시하게 하고 관직과 신분에 따라 자세한 사물(賜物)의 내역을 정하였다. ‘노인사설의’에는 『예기』 「왕제(王制)」 등에 보이는 팔십 노인이 군명(君命)에 절을 하고 ‘일좌지(一坐至)’ 하는 예를 수용하고 있어 당·송의 양로의와는 다른 면도 보이고 있다. 고려의 ‘노인사설의’는 조선 세종대의 양로의로 이어져 좀 더 정연한 예제로 정비되었다.

한편 부부의 윤리를 장려하여 정절이 있는 부인에게 포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로운 지아비에게도 포상하였다. 곧 고려 사회에서는 부의(夫義)와 부절(婦節)의 윤리가 요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부인의 경우 외적의 침입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개를 더럽혔다고 하여 아내를 버린 사람은 벼슬을 파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처부모에 대하여 오복 제도에서 부조(父祖)의 다음가는 복을 입게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로 보아 고려의 유교 문화는 부모에 대한 효와 국가에 대한 충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부부의 윤리에서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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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포은 정몽주 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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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교 의례가 고려 사회에서 널리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 등 불교 의례와 우리 고유의 의례가 혼합된 축제가 국가적으로 거행되었다. 이러한 예가 『고려사』 「예지(禮志)」 길례(吉禮)에 포함되어 있지만 완전한 유교 의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려 왕실에서 유교 의례가 어느 정도 시행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당나라의 개원례(開元禮)나 송나라의 예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일반 관료들이 아직 유교 의례를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 일례로 상례(喪禮)를 보더라도 공민왕대까지는 백일 탈상(百日脫喪)이 주를 이루었다. 이색(李穡, 1328∼1396)이 부모가 돌아가자 삼년상을 지냈다는 것은 그때까지 고려 사회가 일반적으로 삼년상을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1390년(공양왕 2)에 비로소 제례에서 조상을 제사 지내는 대수(代數)에 관해 대부(大夫)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 일반 백성은 부모 1대에 한하도록 하였다.58)『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6품까지 3대, 7품 이상 2대, 일반 서인은 부모 1대에 한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대명률(大明律)』의 복상제(服喪制)를 바탕으로 부모의 복상을 3년으로 하도록 다시 정하였다. 이색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로 부른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사대부와 서인이 모두 사당을 세우고 신주(神主)를 만들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자고 하였다. 이러한 유교의 상례와 제례가 사대부와 서민에게까지 통용된 것은 적어도 조선이 개국하고서도 수세기가 지난 17세기 중반 이후가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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