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 1.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 고려 후기의 성리학 도입
이영춘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고려 후기에 도입된 원대의 성리학이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13세기 후반에 고려 정부가 몽고에 대한 오랜 항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돌아가 원나라에 복속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사람들의 왕래와 교섭이 많아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60)고려 말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에 대하여는 대략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이원명, 『고려시대 성리학 수용 연구』, 국학 자료원, 1997. ; 고혜령, 『고려 후기 사대부와 성리학 수용』, 일조각, 2001. ; 정옥자, 「여말(麗末) 주자 성리서(朱子性理學)의 도입에 대한 시고(試考)」, 『진단학보』 51, 진단학회, 1981. ; 이병휴·주웅영,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흥학(興學) 운동-성리학 수용 및 그 배경과 관련하여-」, 『역사 교육 논집』 13·14, 역사 교육 학회, 1990. ; 문철영, 「여말 신흥 사대부들의 신유학(新儒學) 수용과 그 특징」, 『한국 문화』 3, 서울 대학교 한국 문화 연구소, 1982. ; 이원명, 「여말선초 성리학 이해 과정 연구-학풍(學風)의 변화와 과거 책문(科擧策問)을 중심으로-」, 『국사관 논총』 92, 국사 편찬 위원회, 2000. ; 문철영,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 『한국사』 21, 국사 편찬 위원회, 2003. 성리학은 북송에서 발생하였고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集大成)하였지만, 그것이 중 국에서 국가적으로 채택되고 사회 전체에 성행하게 된 것은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가 1279년에 남송을 통합한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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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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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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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던 주자학파의 성리학은 남송의 멸망 무렵에 조복(趙復, 1200∼1277), 요추(姚樞, 1204∼1280), 허형(許衡, 1209∼1281) 등에 의해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으로 전해졌고, 원나라 정부에 수용되었다. 허형은 당대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국자감(國子監)에서 성리학을 전수하여 원대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후 성리학은 원나라의 공인된 관학(官學)이 되었고, 원대의 과거는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표준으로 삼았다. 원대의 성리학을 주도한 허형 등의 학풍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통한 수행 및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중용(中庸)』의 존덕성(尊德性)·도문학(道問學) 등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대의 과거에서는 주 자의 『사서집주』가 중심 과목이 되었다.61)고혜령, 『고려 후기 사대부와 성리학 수용』, 일조각, 2001, 96∼97쪽.

고려에서 성리학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도 그것이 원나라의 공인 학문 체계로 연경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족과 학자가 빈번하게 연경을 왕래하고, 만권당(萬卷堂)에서 중국 학자와 토론하는 등 왕성한 학술 활동이 큰 계기가 되었다.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중엽까지 성리학의 도입기에 많은 고려의 학자와 관료가 원나라를 왕래하였다. 그 중에 일부는 원나라의 과거인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그곳에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원나라에서 관학으로 융성하던 성리학을 깊이 체득하고 고려에 전파시킬 수 있었다.

고려의 성리학 도입과 수용은 몇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도입 단계로 13세기 후반(충렬왕∼충숙왕)에 안향(安珦, 1243∼1306), 백이정(白頣正, 1247∼1323), 권보(權溥, 1262∼1346)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국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여러 차례 원나라에 왕래하면서 신흥 학문인 성리학을 연구하여 도입하였고, 성균관(成均館)의 교관(敎官)이나 지공거(知貢擧)를 지내면서 성리학을 보급하고 학자를 양성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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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초상
안향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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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와 보급한 인물은 안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289년(충렬왕 15) 11월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성리학에 심취하여 손수 주자서(朱子書)를 필사하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왔다. 1296년(충렬왕 22)에 다시 왕을 따라 연경에 갔다 온 후에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1298년 8월에는 새로 즉위한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고, 1303년(충렬왕 29)에는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문묘(文廟)에서 사용할 제기, 악기 및 육경(六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주자서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는 양현고(養賢庫)와 섬학전(贍學錢)을 확충하여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고, 1304년 6월에는 성균관을 개수하고 공자와 선유(先儒)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그가 자신의 호를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차용하여 회헌(晦軒)으로 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주자에 대한 경도를 알 수 있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하고 학풍을 진작시킨 선구자였다.

백이정은 안향과 연배가 비슷하였지만 그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거기서 10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귀국할 때는 정자·주자의 서적과 『가례』를 가지고 왔다. 그도 후진 양성에 힘써, 이제현(李齊賢, 1287∼1367)·박충좌(朴忠佐)·이곡(李穀, 1298∼1351)·이인복(李仁復, 1308∼1374)·백문보(白文寶, 1303∼1374) 등 많은 문인을 양성하여 고려 말의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가례』를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안향과 백이정의 학통은 이제현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의 학문은 이색(李穡, 1328∼1396)으로, 이색의 학문은 권근(權近, 1352∼1409)과 변계량(卞季良, 1369∼1430)으로 이어졌다.

권보는 약관에 급제한 이후에 주로 성균관의 교관과 시강학사(侍講學士) 등을 지내면서 학문 분야에 종사하였다. 그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고, 지공거가 되어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국왕에게 건의하여 『사서집주』를 간행·보급함으로써 성리학의 전파에 공헌하였다. 이제현은 그의 사위였다.

우탁(禹倬, 1263∼1342)도 앞의 인물들과 비슷한 시기에 성균 좨주(成均祭酒) 등의 교관을 지냈고, 노후에는 예안(禮安)에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 들어온 정주학을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수하였다. 특히 정이(程頣)의 『주역(周易)』 해설서인 『정전(程傳)』을 깊이 연구하여 이 시기 성리 철학의 이해에 기여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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