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 1.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 고려와 원나라의 교류와 성리학
이영춘

그 다음 단계는 14세기 초·중엽(충숙왕∼공민왕 초기)으로 성리학 도입의 제2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제현·최해(崔瀣, 1287∼1340)·이곡·백문보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백이정의 문인으로 충선왕∼충숙왕대에 만권당 등을 통하여 한층 활발하게 진행된 교류 분위기 속에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국내 교육 활동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고 성리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 개혁 이념을 갖춘 새로운 정치 집단이 결속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유학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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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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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최고의 학자는 이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이정의 제자였고, 권보의 사위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성리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1314년(충숙왕 1) 상왕이었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연경의 만권당에서 6년 동안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강남 출신의 당대 석학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자와 학문을 토론하며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이제현은 1316년(충숙왕 3)에 서촉(西蜀)의 아미산(峨眉山)을 다녀왔고, 1319년에는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까지 충선왕을 시종(侍從)하였으며, 1323년(충숙왕 10)에는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고 왔다. 이러한 여행은 그가 성리학을 비롯한 중국 문화에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현은 귀국 후에 성균 좨주, 선부전서(選部典書) 등을 역임하고 지공거가 되어 인재의 선발을 주관하였으며, 1351년(공민왕 즉위년)부터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시작되자 정승에 임명되 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는 네 번이나 수상을 역임하였고, 1353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 35명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이제현은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격물치지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을 강조하고 정자·주자의 학문을 숭상한 것을 보면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고려에 이미 “집집마다 정주(程朱)의 책이 있고 사람마다 성리(性理)의 학문을 알고 있다.”고62)이제현(李齊賢), 『익재난고(益齎亂藁)』 권9, 책문(策問). 할 정도였으므로 성리학의 보급이 상당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최해는 이제현의 지기(知己)로 약관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 등을 지낸 후에 1320년(충숙왕 7)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제수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관직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지만, 선비의 기개를 지켰고 저술에 힘썼으며 사우(師友)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불교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도 그였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한 학자 중에는 백문보가 있었다. 그는 과거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가의 유교 의례(儀禮) 정비에 참가하였으며,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고려 국사(國史)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도를 강조하고 불교의 공리화복설(功利禍福說)을 비판하면서 척불소(斥佛疏)를 올려 이단(異端)의 위험을 강조하고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여 승려들을 단속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단 배척과 정학(正學, 유학) 수호의 주장을 보면 고려의 성리학이 상당한 단계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원나라 조정에서 오랜 기간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 휘정원 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 좌우사 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중서성 감창(中書省監倉),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 낭중(左右司郎中) 등을 역임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원나라 학자와 장기간 교유하면서 당대의 학풍을 체득하였고 고려에 돌아와 이를 보급하였다. 당시 원나라의 성리학은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하는 수행 및 실천의 학문이었다. 이곡도 이러한 학풍에 영향을 받아 ‘경이직내(敬以直內)’를 통해 경(敬)과 성(誠)의 수행을 강조하였고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그의 아들 이색에게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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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때 관학으로 정립된 성리학을 고려에 전파하고 보급하는 데는 학자 간의 교류가 필수적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하여 두 나라를 오가며 벼슬을 하였던 학자의 역할이 컸다.63)제과(制科) 급제자들을 통한 성리학의 수용에 대하여는 고혜령, 앞의 책 참조. 이들은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당대의 정예(精銳)로 제과에 급제한 후에는 원나라 조정에서 관료 생활을 하기도 하고 고려로 돌아와 활동하기도 하였다. 제과는 소수 민족 출신 학자에게 급제 인원을 할당한 특별 과거였으나, 원대의 다른 과거와 같이 거의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고려인이 응시한 제과에는 몽고인과 색목인을 합하여 한 명의 급제자가 배정되어 있었으나, 고려에서 간 학자들이 급제를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제과는 비록 정규 과거와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급제자는 천하에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어 큰 영광을 누렸다. 고려인 학자는 1317(충숙왕 4)에 안진(安震)이 급제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회 한 명씩 급제자를 내고 있는데, 그 현황은 표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고려의 학자’와 같다.

원나라 제과 급제자 중에서 가장 저명하고 독보적인 활동을 한 인물은 이곡과 이색 부자였다. 이들은 원나라 조정에서 오래 벼슬을 하였고,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학문·교육·정치의 다방면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이색은 고려 말에 최고의 명망을 가졌던 학자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안축(安軸, 1287∼1348)과 안보(安輔, 1302∼1357) 형제도 제과에 급제한 후에 원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고려로 돌아와 요직에 올랐다.

<표>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고려의 학자
성명 생몰년 제과 급제 연도 원나라에서의 관직 고려 과거 고려에서의 관직 비고
안진(安震) 1293∼1360 1317(충숙왕 4)   1313 밀직부사 정당문학
(密直副使政堂文學)
 
최해(崔瀣) 1287∼1340 1321(충숙왕 8) 요양로 개주 판관
(遼陽路盖州判官)
1303 검교 성균대사성
(檢校成均大司成)
 
안축(安軸) 1287∼1348 1324(충숙왕 11) 요양로 개주 판관 1307 첨의찬성사
(僉議贊成事)
안보의 형
조렴(趙廉) 1290∼1343 1327(충숙왕 14) 요양등로 총관지부사
(遼陽等路摠管知府事)
1318 밀직부사  
이곡(李穀) 1298∼1351 1332년
(충숙왕 복위 1)
한림 국사원 검열관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
1320 도첨의찬성사
(都僉議贊成事)
이색의
부(父)
신예(辛裔) ?∼1355   정동행성 원외랑
(征東行省院外郞)
  도첨 평리
(都僉評理)
 
이승경(李承慶) ?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
 
이인복(李仁復) 1308∼1374 1342(충혜왕 3) 대령로 금주 판관
(大寧路錦州判官)
1326 검교 시중
(檢校侍中)
 
윤안지(尹安之) ? 1348(충정왕 1) 대령로 금주 판관      
안보(安輔) 1302∼1357 1353(공민왕 2) 요양행성 조마 겸
승발가각고(遼陽行省照磨
兼承發架閣庫)
1320 정당문학 안축의 아우
이색(李穡) 1328∼1396 1353(공민왕 2) 동지제고 국사원 편수관
(同知制誥國史院編修官)
1353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
이곡의 아들
이천기(李天冀) ? 1355(공민왕 4)   1345    
이서(李舒) 1332∼1410 1357(공민왕 6)   1357    
김승언(金升彦) ? 1357(공민왕 6)        
최표(崔彪) ? 1357(공민왕 6)        
✽고혜령, 『고려 후기 사대부와 성리학 수용』, 일조각, 101쪽의 표.

최해는 본국에서 장원 급제하고 제과에도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 판관에 임명된 수재로,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 전파에 기여하였다. 이인복은 백이정의 제자로 성리학의 이론과 실천에 조예가 깊었다. 원나라 제과에 급제한 후 대령로 금주 판관, 정동행성 도사, 정동성원외랑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고려에서도 여러 요직을 거쳐 검교 시중(檢校侍中)에 올랐다. 이들 제과 급제자는 안향·백이정·권보 등이 보급한 성리학의 토양 위에서 국제적인 학자로 성장하였고,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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