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 1.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 사림파와 도학 정치 원리
이영춘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의 최대 성과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이기론과 심성론으로 집약되며, 이는 각기 고봉(高峰) 기대승 및 우계(牛溪) 성혼과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였던 왕복 토론의 결실이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조선 성리학은 중국 정주학의 아류를 탈피하고 독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정립된 조선 성리학의 특성은 인간의 도덕성 수립과 관계된 심성론에 대한 치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후대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전통을 이루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이 추구한 것은 형이상학적인 이론 탐구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림의 주된 관심은 지치주의(至治主義)로 표현되는 이상 정치의 실현, 이를 위한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 교화, 성리학적 예속(禮俗)의 정비와 보급 등으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를 통틀어 도학 실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이 표방한 것은 도학이었다. 도학은 단순히 유교 경전의 학습이나 문예적 소양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요순(堯舜)과 공맹(孔孟)으로부터 전승된 유학의 정신 즉 심법(心法)을 받들어 하나의 도통 체계(道統體系)를 수립하고, 그 정신을 실천하고 사회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념적 성향을 가 진 학문 체계 혹은 학풍을 말한다. 도학을 기치로 내세운 사림은 자아의 완성(修己)과 사회적 실천(治人)을 두 가지 과제로 표방하여, 유교의 원리주의적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표방하는 이상은 곧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일종의 원칙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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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의 글씨
김굉필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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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도학 운동은 먼저 그들 자신의 수양을 위한 도덕과 예법의 실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실천 운동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기본 정신을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의 인격 함양이라고 인식하고, 이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 『소학』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학』은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등이 대를 이어 강학한 교재로서 사림의 심법(心法) 전수와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특히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소학』이야말로 선비의 수양에 요체가 된다고 생각하여 평생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성균관 학생으로 있을 때 정여창(鄭汝昌, 1450∼1504)·남효온(南孝溫, 1454∼1492) 등과 함께 소학계(小學契)를 조직하여 실천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김식(金湜, 1482∼1520)·김안국(金安國, 1478∼1543) 등은 스스로 『소학』을 실천하고, 국가 정책으로 권장 보급하도록 조정에 건의하기도 하였다.65)박연호, 「조선 전기 사대부 교양(敎養)에 관한 연구」,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4, 219∼263쪽. 『소학』은 명분과 의리 정신을 확립하고 절도 있는 예절을 실천하여 선비의 기강을 정립하는 원칙주의적 도덕 교과서였다.

사림은 『소학』과 함께 성리학적 수신서(修身書)라고 할 수 있는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그리고 『대학연의(大學衍義)』 같은 책도 많이 강독(講讀)하였다. 이러한 수신서를 통한 심신의 훈련은 선비들에게 대쪽 같은 성품을 양성하고 강직한 정치적 성향을 키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화가 자주 일어나던 시기에는 『소학』이 훈구파에 의해 금서로 지목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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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집해(小學集解)』
『소학집해(小學集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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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의 천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림의 대표로 조광조를 들 수 있다. 조광조는 김굉필에게서 수기치인의 도학 원리를 전수받았고, 사림계에 속하는 김식·김정(金淨, 1486∼1521)·기준(奇遵, 1492∼1521)·김안국 등 일군의 신진 관료를 거느리고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유교적 도덕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도학을 높이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66)조광조(趙光祖), 『정암집(靜庵集)』 부록(附錄) 권1, 사실(事實). 것이 그들의 구호였다. 그들이 말하는 ‘지치’라는 것은 율곡의 표현에 의하면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왕도 정치를 베풀며 정의의 길을 열고 사리(私利)의 근원을 막는 일”67)이이(李珥),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3,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이었다.

그들이 특히 강조하였던 것은 군주의 도덕성 확립이었다.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확립될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또 군자와 소인의 분별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성 관료 세력이던 훈구파 대신들의 도덕성을 공격하고 그들이 누리던 특권과 정책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국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학문적 소신을 실현하고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들은 경연(經筵)에서 국왕의 도덕성 함양을 강조하고, 도교(道敎) 제사를 담당하던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였으며, 사림의 등용을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는 한편, 훈구파에 타격을 주기 위한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한 향촌의 유교적 교화를 위해 향약 실천 운동을 전개하여 1519년(중종 14)에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전국에 반포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과격한 개혁 운동이 훈구파의 반격을 초래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유발하게 되었다. 사림은 네 차례의 사화를 통해 많은 학자가 목숨을 잃고 정치적 진출에도 심한 타격을 받았으나, 그들이 내세운 도학 정치의 명분과 깨끗한 처신으로 인해 후세의 표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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