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 2. 성리학 연구의 심화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변
이영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논변에서 비롯하여 조선 후기의 성리학계에서 지속적으로 토론한 인간의 심성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을 말한다. 즉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가리키는 사단과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지칭하는 칠정이 발현할 때 작용하는 이와 기의 관계에 관한 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가장 중심적인 연구 과제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커다란 특성이다. 사단칠정 논변은 단순히 사단과 칠정을 이기의 개념과 연결시켜 전개한 논의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신 현상의 실재적인 면과 규범적인 면을 하나의 통일된 틀 속에서 설명하고자 한 철학적 사유의 표출이었다.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는 정지운의 ‘천명도설’ 내용을 퇴계가 수정한 데서 비롯되어 퇴계와 고봉 간의 왕복 논변으로 발전하였고, 이후에 성혼과 이이가 뒤이어 논변을 계승하였다. 이 네 사람 사이에 전개된 사칠 논변은 후대 사칠론(四七論)의 원형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 방대하고 치밀한 논의를 양산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근원적인 문제의식(問題意識)이 결부되어 있었다.69)본장의 사단칠정 논변에 대한 이해는 김현, 『임성주의 생의 철학』, 한길사, 1995에 많이 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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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서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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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일찍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1555년(명종 10) 을사사화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술로는 『성학십도(聖學十圖)』,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慶釋義)』 등과 문집이 있다. 문집 중에는 고봉 기대승과의 왕복 편지가 학술적으로 중요하다. 퇴계의 학문은 대개 정주의 학설을 추종하였으며, 그의 이기심성설은 주자의 학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대체로 주자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를 보완 확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퇴계의 성리학은 양반 관료 국가의 지배 사상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70)이성무, 앞의 글, 37쪽.

주자는 이기(理氣)의 고유성(不雜性)과 결부성(不離性)을 동시에 말하였으나, 퇴계는 그 고유성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이와 기는 반드시 다른 것이다(理氣決是二物).”라는 주자의 언명(言明)은 퇴계의 이기론에 기초가 되었다. 퇴계는 주자의 설을 부연한 ‘이기는 하나가 아님에 대한 변증(非理氣爲 一物證辨)’을 지어 이기의 고유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기는 능히 응결하고 조작하나 이는 정의와 조작이 없다.”고 하여 이의 독자적 작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퇴계는 이와 기가 모두 실재적인 작용이 있다 하여, 이를 추상적·형식적·무위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태극에 동정(動靜)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요, 천명이 유행(流行)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또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이의 작용 능력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이가 스스로 동정하고 유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퇴계는 주자와 같이 도기이원론(道器二元論)으로 우주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도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이(理)로 표현되고, 기(器)는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는(可善可惡) 기(氣)로 묘사되었다. 즉, 도는 절대 가치의 표준을 의미하고 기(器)는 상대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이기를 이원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음(心)의 본체인 성(性)을 본연(本然)의 성과 기질(氣質)의 성으로 구별하였고, 성이 발현한 정(情)도 사단과 칠정으로 대비하여, 본연의 성과 사단의 정을 절대 순선한 이(理)의 체(體)와 용(用)으로 보고, 기질의 성과 칠정은 선악이 가변적이며 상대적 가치를 지닌 기(氣)의 작용으로 보았다. 또 사단과 칠정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나뉜 것으로 생각하여, 인심은 칠정, 도심은 사단으로 인식하였다.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은 1559(명종 14)부터 7년 동안 지속되었다.

기대승은 퇴계의 천명도에서 표현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대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고봉에 의하면 사단과 칠정은 똑같이 하나의 정이고, 칠정 밖에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에 나누어 붙이게 되면 이와 기를 독립된 별개의 것(別物)으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는 기가 없고 칠정 속에는 이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단칠정의 문 제는 인심 도심의 문제와는 달리 이기에 나누어 붙여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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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천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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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퇴계는 『주자어류』에 “사단이지발(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이란 구절이 있는 것을 찾아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기는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지적하여 말하자면 구별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성에 본연(本然)과 기품(氣稟)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다는 인식이었다. 성을 이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지만 그 유래된 바(所從來)와 주장하는 바에 따라 이기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고봉은 자신의 미흡함을 인정하였으나 근본적 의심은 버리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칠정도 발동하여 모두 바르게 맞으면(中節) 사단과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고, 칠정은 비록 기에 속하지만 이가 본래 그 가운데 있으니 발동하여 바르게 맞는 것은 천명지성(天命之性)이요 본연지체(本然之體)이니, 이기가 발동하는 것이 사단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봉의 반론에 퇴계는 승복하지 않았으나, 결국에는 그의 뜻을 수용하여 자신의 설을 조금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퇴계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 사단을 “이가 발동하되 기가 따라간 것(理發而氣隨之)”으로 칠정을 “기가 발동하되 이가 탑승한 것(氣發而理乘之)”으로 확정한 것이다.

퇴계가 심성에서 사단과 칠정을 구분한 것은 이의 우위성을 확보하여 칠정으로 나타나는 기의 타락 가능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본연과 기질을 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는 확고한 도덕적 입장에서 나왔다. 그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희·노·애·구·애·오·욕 같은 자연적인 감정(七情)은 그 발출 원인이 기에 있지만 측은(惻隱)·수오(羞惡)·시비(是非)·사양(辭讓) 같은 마음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 원리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사단은 기의 발동이 아닌 이의 발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는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도덕적 의무와 능력을 타고났다고 보려는 성리학의 중심 과제와 합치하는 것이었다.71)김현,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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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심통성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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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도덕 수양을 학문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수양론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경궁리(居敬窮理)’라고 할 수 있지만, 특히 ‘경(敬)’에 치중하였다. 그에 의하면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유래하는 도심(四端)을 확충하고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유래한 인심(七情)을 구분하여 인욕(人欲)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이 필요한데, 그 바탕이 되는 것이 공경(恭敬)이었던 것이다. 공경은 인간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아를 확고부동하게 지키려는 태도이며, 진리에 나아가는 바탕을 이루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의 성리학은 영남학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율곡과 같은 기호학파 학자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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