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2장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
  • 4. 예학의 발달
  • 전례 논쟁
이영춘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토착화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는 예학의 수준도 아울러 향상되었다. 이에 따라 16세기 후반부터는 왕실의 종통 (宗統) 관련 전례(典禮)나 왕위 계승 문제에서 활발한 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는 그것이 대대적인 정치 분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이 인조의 생부였던 원종(元宗)의 추존 전례와 효종의 정통성 문제로 일어났던 두 차례의 복제(服制) 예송(禮訟)이다. 이러한 문제는 예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였다면 별로 쟁점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대에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된 예송은 대왕대비인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효종과 효종비의 상에 입을 복제를 두고 일어났던 분쟁이다. 문제의 핵심은 차자(次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특수한 종법적(宗法的) 위상에 있었다. 남인의 삼년설(三年說)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은 종통론적으로 효종을 인조의 장자 또는 차자로 볼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76)현종대의 복제 예송에 대하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황원구, 「기해복제 논안 시말(己亥服制論案始末)」, 『연세 논총』 사회과학편 2, 연세 대학교, 1963. ; 유정동, 「예송(禮訟)의 제 학파(諸學派)와 그 논쟁(論爭)」, 『한국 철학사 연구』 중, 동명사, 1978. ; 지두환, 「조선 후기 예송 연구」, 『부대 사학(釜大史學)』 11, 부산 대학교 사학회, 1987. ; 정옥자, 「17세기 사상계(思想界)의 재편(再編)과 예론(禮論)」, 『한국 문화』 10, 서울 대학교 한국 문화 연구소, 1989. ; 이영춘, 「제1차 예송과 윤선도(尹善道)의 예론(禮論)」, 『청계 사학』 6, 청계 사학회, 1989. ; 정인재, 「윤백호(尹白湖)의 예론과 윤리 사상」, 『현대 사회와 윤리』,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82. ; 정인재, 「조선조 예학의 철학적 특성-다산(茶山)의 기해예송(己亥禮訟)의 해석을 중심으로-」, 제1회 동양 철학 국제 학술 회의 발표 요지, 원광 대학교, 1990,11. ; 이영춘, 「복제 예송과 정국 변동-제2차 예송을 중심으로-」, 『국사관 논총』 22, 국사 편찬 위원회, 1991. ; 이성무, 「17세기의 예론과 당쟁」,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2. 여기에는 당시에 발달한 조선 예학의 두 경향으로 말미암은 학문적 시각 차이가 개재되어 있었다. 효종을 장자로 보는 쪽은 제왕가례(帝王家禮)의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왕실에서는 형제의 차례보다 왕위의 계승자에게 적통(嫡統)을 주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반면 효종을 차자로 보는 쪽은 예의 보편적 원리를 강조하여 왕실과 사서인(士庶人)의 예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효종은 왕위의 계승에도 불구하고 차자라는 신분에 변동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쪽의 주장에는 『의례』의 복잡한 주소(註疏)들이 전거로 제시되었으나, 그 전거도 역시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확답이 나올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논쟁은 끝없이 지속되었다.

1659년(효종 10)에 시작된 제1차 예송은 처음에 학문적 논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여기에 내포된 하나의 금기 사항 곧 효종의 정통성 시비가 촉발되면서 위험한 정치적 분쟁으로 변모하였다. 윤선도(尹善道)에 의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공격을 받은 서인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이 때문에 윤선도를 비롯한 남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렇 게 하여 조정에는 서로를 군자(君子)-소인(小人)으로 나누는 흑백 논리(黑白論理)가 팽배하게 되었다. 서로가 견제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공존을 인정하던 풍토는 사라지고 각박한 당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결국 제2차 예송 이후 수차례의 환국(換局)을 거치면서 반대당을 용납하지 않는 일당 전제의 추세로 나아갔다. 따라서 예송은 조선 후기의 정치 환경을 악화시킨 계기가 되었다.77)이영춘, 『조선 후기 왕위 계승 연구』, 집문당, 1998, 240∼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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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寧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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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의 제2차 예송은 본질적으로 제1차 예송 때와 같은 내용이었지만, 논쟁의 담당자는 다른 사람들이었으며, 또 그것은 서인과 남인의 대결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 논쟁은 서인 중심의 신료 집단(賓廳議禮諸臣)과 현종·김석주(金錫胄) 중심의 왕실 집단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또 어떻게 보면 송시열 일파와 외척(外戚)인 청풍 김씨(淸風金氏) 일파의 대리전과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예송을 단순히 제1차 예송의 반복으로 생각하여 이를 서인 대 남인 간의 당파 대결로 파악하는 인식은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제2차 예송에서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타도한 주역은 바로 현종 자신과 외척 김석주였기 때문이다.78)이영춘, 앞의 책, 272쪽.

17세기에 극도로 발달하였던 예학은 조선 양반 사회에 성리학적 예속을 보편화시키고 향촌 사회를 유교 이념으로 교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지나친 논쟁을 초래하여 예송과 같은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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