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
  • 2. 성리학 경세 이념의 전개
  • 조선 전기 군주의 『대학연의』 학습
조성산

조선 건국 이후 왕들의 『대학연의』 학습은 본격화되었다. 태조는 조준(趙浚, 1346∼1405)의 건의에 따라 무인 시절부터 이미 『대학연의』를 읽고 있었으며, 즉위 후에도 『대학연의』를 강론하였다. 태조 때 『대학연의』는 경연 교재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고, 경연을 매일 개최하도록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노력으로 『대학연의』는 점차 현실 정치를 해석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데 구체적으로 응용되었다.

태종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었다. 태종은 『대학연의』 강론에 있어 매우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대학연의』 학 습과 열의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세자 시절 태종은 『대학연의』를 강할 때 당나라 숙종대의 일을 논하며, 병권(兵權)을 하나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6)『정종실록』 권4, 정종 2년 6월 20일(계축). 이는 조선 초기 사병 혁파 문제(私兵革罷問題)를 거론한 것이었다. 불교 폐지 등의 국가 현안에도 『대학연의』의 이단론(異端論) 내용은 중요하게 이용되었다.87)『태종실록』 권1, 태종 원년 윤3월 23일(임자). 태종은 『대학연의』의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서 『대학연의』를 재분류하여 편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학연의』에 대한 관심을 계승하여 세종과 문종은 경연을 열고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주로 기근, 농사 등 민생과 관련된 문제가 중심이었다. 세종은 『대학연의』를 외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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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초상
신숙주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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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에 이르러서는 『대학연의』에 대한 기존의 적극적인 인식이 다소 조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세조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에게 내린 전교(傳敎)에서 『송원절요(宋元節要)』, 『통감강목(通鑑綱目)』, 『대학연의』 중에 무엇을 먼저 강론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신숙주는 『송원절요』가 근대의 일이라서 마땅히 먼저 강론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88)『세조실록』 권1, 세조 1년 6월 13일(정사). 『송원절요』도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을 알고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역사책이지만, 경사 일체(經史一體)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학연의』에 비해 성리학적 위상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은 『송원절요』를 중시하는 입장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89)『성종실록』 권24, 성종 3년 11월 12일(갑진). 이러한 모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리하게 집권한 세조 정권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90)지두환, 「제2장 조선 전기 『대학연의(大學衍義)』 이해 과정」, 『조선 전기 사상사(思想史)의 재조명』, 역사 문화, 1998, 61∼63쪽.

이후 성종 때는 경연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립되면서 『대학연의』의 강론도 다시 활발히 이루어졌다. 성종은 경연에 적극 임하면서 『대학연의』를 강론하였으며, 현실 정치와 관련하여 이를 진지하게 학습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통치 후반기에 특히 두드러졌다. 그 과정에서 성종은 『대학연의』를 군주가 마땅히 보아야 할 책이니 야대(夜對)보다는 꾸준히 공부할 수 있는 석강(夕講)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대학연의』에 대한 성종의 열의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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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어필
성종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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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성종 25)에는 명대 구준(丘濬, 1421∼1495)이 『대학연의』를 보완해서 만든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도 수입되었다. 『대학연의보』를 완성 한 때(1487)와 조선에 수입된 시기에 별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당대 사람들이 『대학연의』에 기울인 지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성종대에 『대학연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일반 지식인층의 학문 성과도 나왔다.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대학연의』를 간추리고 『고려사』의 내용을 보완하여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여 성종에게 바쳤다. 이 책은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지만 최초로 『대학연의』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중종반정(1506) 과정을 통해 사림(士林)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면서 『대학연의』의 강론은 더욱 활발해졌다. 중종이 즉위하자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경연의 진강(進講)은 아침에는 『상서(尙書)』, 낮에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저녁 및 야대에는 『대학연의』로 하게 되었음을 아뢰었다. 이들 저작은 모두 성학 정치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으로 중종대 사림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중종 때 『대학연의』의 진강은 주로 신하들이 왕에게 올바른 정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볼 때 『대학연의』를 통한 성리학 정치 이념의 구현은 그 주도권이 군주에서 신하들에게 넘어간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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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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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왕비의 간택을 둘러싼 논의이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정광필(鄭光弼), 우의정 김응기(金應箕)는 범조우의 『대학연의』 중 배필을 가리는 것에 대하여 의논한 대목을 들어 중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이에 중종은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며 이 문제를 뒤로 미루었다.91)『중종실록』 권23, 중종 10년 10월 2일(을묘). 훗날 중종은 후궁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중전에 올리려 하였으나, 정광필이 『대학연의』의 제가(齊家)하는 요체와 범조우가 후비(后妃) 간택을 논한 일을 들어 반대하여 결국 중종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하였다.92)『중종실록』 권28, 중종 12년 7월 22일(병신). 『대학연의』가 민감한 사안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 중요한 사례이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반정을 통해 집권한 중종 정권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조선 초기 군주가 성리학적 국정 개편을 위해 『대학연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제는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신하들이 군주의 독단적인 정치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대학연의』를 통한 성학 군주론(聖學君主論)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연산군의 독단적인 전횡을 종식하고 성학 정치를 표방하며 중종이 모범이 되기를 바랐던 사림은 『대학연의』를 성학 교육의 중요한 교재로 인식하였다.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대학연의』를 만세 임금들의 귀감(龜鑑)이며, 천하를 다스리는 분들의 율령(律令)이요 격례(格例)라고 극찬하였던 것을 통해 중종대 사림이 가졌던 『대학연의』에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93)『중종실록』 권26, 중종 11년 9월 20일(무술). 중종대에는 『대학연의』뿐 아니라 구준의 『대학연의보』도 강론이 이루어졌다.94)중종대 『대학연의보』 진강의 의미에 대해서는 윤정, 「조선 중종·영조대 대학연의보 진강(進講)의 의미」, 『진단학보』 24, 진단학회, 2001, 85∼90쪽 참조할 수 있다.

이처럼 중종대에는 『대학』에 대한 관심이 성학 군주론과 관련하여 증폭되었다. 유숭조(柳崇祖, 1452∼1512)는 ‘대학삼강팔목잠(大學三綱八目箴)’을 지었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대학』이 임금을 위해 지어졌다고 하여 성학의 측면에서 『대학』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을 통해 성학 군주론의 논리적 기반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학』과 『대학연의』는 명실상부하게 군주학과 제왕학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인식되었다.

명종대에는 『대학연의보』의 예를 본받아 명대(明代)에 담약수(湛若水, 1466∼1560)가 찬술한 『성학격물통(聖學格物通)』도 진강되었으며, 『대학연의』는 선조와 광해군 때에도 꾸준히 강론되었다. 특히 이이(李珥, 1536∼1584)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대학연의』를 조선의 상황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95)정재훈, 「조선 전기 『대학(大學)』의 이해와 성학론(聖學論)」, 『진단학보』 86, 진단학회, 1998, 129쪽. 이는 『대학연의』의 이해 과정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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