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
  • 5. 호락 논쟁과 성리학 경세관의 대립
  • 호락 논쟁의 역사적 배경
조성산

호락 논쟁이 추상적인 심성 논쟁을 벗어나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 사회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대적 정황과 배경을 대외적 배경, 사회 경제적 배경, 정치적 배경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34)이 글에서 서술한 호락 논쟁의 배경 설명과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조성산, 「18세기 호락 논쟁과 노론(老論) 사상계(思想界)의 분화」, 『한국 사상 사학』 8, 한국 사상사 학회, 1997의 내용을 참조하여 구성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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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대외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집권층은 병자호란과 명청 교체 이후 심각한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오랑캐라고 배척하던 청나라가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 세력이 되면서 북벌론(北伐論)은 무력 이 제거된 채 중화 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존주론(尊周論)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변화는 조선의 집권층에게 새로운 대외관(對外觀), 화이론(華夷論),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요구하였다.

둘째, 사회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앙법(移秧法) 등 새로운 농법의 전국적인 보급과 함께 광작(廣作) 경영이 가능해지면서 농민층의 성장이 이루어졌고, 상업의 발전과 대외 무역으로 인해서 한양은 도시적 양상을 띠는 등 새로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농업과 상업의 발전에 따른 사회 경제적 변화는 농민층 및 하층민의 사회적 자각을 불러왔다. 이것은 집권층에게 기존의 인성론(人性論)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을 요구하였다. 집권층은 사회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기존 사회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들을 계속해서 기존 질서 속에 묶어 두기 위해서 농민층 및 하층민의 성장을 일부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과 교화론이 필요하였다.

셋째,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한계점에 이른 당쟁을 지양하고자 조야(朝野)에서 탕평론(蕩平論)이 대두하고 있었다. 특히 신임옥사(辛壬獄事, 1721·1722) 처리 문제는 탕평론 문제와 결부되면서 심각한 정치 논쟁을 유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문제와 함께 군자 소인론(君子小人論), 충신 역신론(忠臣逆臣論)이 중요한 담론으로 대두되었다. 당쟁과 탕평 정국 과정에서 제기된 인간 본성에 대한 문제 등은 당시 성리학이 가지고 있던 심성론의 문제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호락 논쟁의 주제였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 미발심체(未發心體) 논쟁, 성범인심동이(聖凡人心同異) 논쟁은 인성의 세밀한 부분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서,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소인의 교화와 수양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었다. 이것에 따라 소인으로 지목한 정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될 수 있었다.

당시 전개된 사회·경제·정치 변화의 제 양상은 성리학 자체 내에서 자기 변화의 논의를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논의는 성리학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이기심성론의 재정립과 그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성리학 속에는 인성론과 치국론(治國論)이 불가분의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심성론의 탐구 속에서 경세적인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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