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
  • 5. 호락 논쟁과 성리학 경세관의 대립
  • 호락 논쟁의 역사적 의의
조성산

낙론계는 호론계의 논의를 “천하 사람들이 선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沮天下爲善之路).”고 비판하면서, 호론의 사상 체계가 천하 사람이 선하게 되는 길을 막는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였고, 호론계는 낙론을 가리켜 결국에는 ‘무분’ 곧 분별 없는 논의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호론계는 낙론계의 인물성동의 주장에 크게 반발하면서 ‘인수무분(人獸無分)’을 강력히 제기하였다. 호론계는 사물을 곧 금수와 동일한 어휘로 인지하는 경향이 강하였던 것이다. 반면 낙론계는 물(物)을 외물(外物), 비아(非我)의 의미인 객관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물성동을 주장하면서도 곧이곧대로 사람의 성과 짐승의 성이 그대로 같다는 의미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호론은 낙론의 심설(心說)에 대해서도 불교의 심순선설(心純善說)과 흡사하다고 하여 유석무분(儒釋無分)이라고 비판하였고, 허형(許衡, 1209∼1281)을 추존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이무분(華夷無分)이라고 배격하였다. 결국 이러한 ‘저천하위선지로’와 ‘무분’의 비판 구조는 논쟁을 확대·발전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들이 서로를 비판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은 수양론(修養論)에서 ‘낙관주의적 성향(=낙론계)’과 ‘엄격주의적 성향(=호론계)’의 대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론계는 공부와 수양을 쉽게 하여 많은 사람이 빠르게 일정한 도덕적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면, 호론계는 성인과 범 인의 엄격한 분별을 강조하여 수양 주체로 하여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수양을 완성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17세기 후반 ‘주자 절대화’ 경향과 ‘존주대의론(尊周大義論)’으로 요약되는 송시열의 정치 사상은 소론·남인과의 대결 과정에서 노론이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송시열의 정치 사상도 ‘청나라의 정권 안정’과 함께 쇠미해져 가는 ‘북벌 의지’, 왕조의 지속적인 ‘탕평에의 노력’ 등을 통해 점차 그 모습을 변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즈음에 노론 내에서 호락 논쟁이 발생하였다. 송시열의 적전(嫡傳)으로 알려진 ‘권상하-한원진’ 계열과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나 어느 정도 구분되는 학문 배경을 가지고 있던 ‘김창협·김창흡’ 계열이 결국에는 서로의 사상적 차이를 드러내면서 분화하여 갔던 것이다.

앞서 지적한 저천하위선지로와 무분의 상호 비판은 바로 이러한 사상 분기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낙론계의 사상 목표는 ‘분별 의식을 통해 지배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호론계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개개 사물이 ‘도덕적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사회 계층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지배 질서를 재정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교화론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도 개개 주체들에게 최대한 ‘도덕적 가능성’을 인식시켜 주면서 자발적으로 성리학적 ‘정(正)’의 길을 걷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낙론의 사유와 교화론은 현실 세계에서 노론이 당면한 여러 문제에 응용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대청(對淸) 관계에서 낙론의 사유는 화이론(華夷論)을 극복하면서 북학 사상(北學思想)으로 발전되어 가기도 하였고, 탕평 정국에서는 성선론과 소인 교화론을 명분으로 다른 당파를 일부 포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낙론계는 다양한 정치 세력으로 분화되어 영조대에는 완론 탕평론(緩論蕩平論), 의리 탕평론(義理蕩平論), 부홍파(扶洪派)·공홍파(攻洪派)에, 영조 후반기에는 일부가 청명당(淸明黨)에 가담하기 도 하였다. 정조대에는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시파(時派)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들 시파에 가담한 자는 탕평 정국에 탄력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반면 호론계는 이와 대조적인 양상을 보였다. 한원진은 매우 계층적인 신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주제를 강하게 옹호하고 있었다.138)유초하, 「조선 후기 성리학의 사회관-한원진(1682∼1751)의 경우-」, 『한국 사상사의 인식』, 한길사, 1994. 한원진의 심성론이 현실화하여 정치 논리로 변할 때에는 노론만이 군자당(君子黨)이라는 노론 일당 정치론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139)한원진(韓元震)의 노론 일당 정치론(老論一黨政治論) 구조에 대해서는 김준석, 『조선 후기 국가 재조론(國家再造論)의 대두(擡頭)와 그 전개』, 연세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0, 394∼448쪽 참조. 신임옥사를 거치면서 한원진 단계에 이르면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쟁은 이미 군자 소인론을 넘어서 충역 시비(忠逆是非)로 치닫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색 간의 조제 보합론(調劑保合論)은 사실상 설자리를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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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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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은 성삼층설을 통해서 예전에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본연지성조차 차별성을 갖는 기질지성의 범주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성인과 범인이 미발심체 단계에서부터 일정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야기하는 심성론 속에서 소론과 남인을 군자로서 포섭할 수 있는 조정론(調停論)과 조제론(調劑論)이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한원진이 강경한 노론 의리론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심성론이 그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실제 호론계의 정치적 동향을 보면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단일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노론 의리론을 강경하게 주장하면서 영·정조대 탕평 정국에 비타협적인 모습을 유지해 나갔다. 이와 같은 한원진의 사상은 호서 향촌 사회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19세기 후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으로까지 일부 연결되었다.140)김상기, 「김복한(金福漢)의 학통(學統)과 사상」, 『한국사 연구』 88, 한국사 연구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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