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유교적 예속과 의례의 흐름
  • 유교와 불교
이영춘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이다. 일찍이 중국에서 수입된 유교는 삼국시대 이래 2,000여 년간 국가 통치와 지배층 양성을 위한 교육 수단이 되었다. 불교가 극성하였던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서도 나라에서 태학(太學)·국학(國學) 혹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유교 교육을 장려하였고,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유교 사회화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조선 왕조는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유교화를 국가의 중요 정책으로 삼았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한자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고, 한자의 전래와 함께 정치 이념과 교육의 수단이 유교에 바탕을 두게 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에 태학이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나 신라의 국학이 모두 국가 차원의 유교적 교육 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받아들인 불교는 왕권의 강화나 사회적 통합 혹은 일반 국민들의 정신적 구원과 안식을 위한 종교적 기능을 수 행하여 크게 융성하였고, 고려시대까지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 시작된 불교 사회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에는 유교적 이념이 중요한 기능을 하였고, 실제의 행정이나 교육·문화 활동에는 유학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향교가 세워졌고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 계층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도입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 비판은 조선 왕조 건국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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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명문 목간(論語銘文木簡)
논어 명문 목간(論語銘文木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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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불교를 ‘수신의 근본(修身之本)’으로, 유교를 ‘치국의 근원(理國之源)’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정치에 관하여는 유교에 그 몫을 돌렸다. 두 종교는 맡은 바가 따로 있으므로 그 기능을 섞어서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현실 정치를 중시하는 유교와 내세 구원을 중시하는 불교의 근본적 성격 차이를 제대로 인식한 것이다. 아울러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며, 불교의 국정 개입을 비판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유학자들 중에는 불교를 깊이 믿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최승로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시대에 유교와 불교가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유학자들 중에는 불교를 비판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거나 호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불교 비판도 사찰과 승려들의 사회적 폐단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새로운 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이 전래하고 신흥 사대부 계층에서 이를 신봉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도 점차 거세졌고,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도 시작되었다. 이는 성 리학이 한·당대(漢唐代)의 유학에 비하여 더 심오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고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을 구분하여 배척하는 기풍이 강하였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학을 정통 학문으로 받들고, 불교나 도교를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최해(崔瀣, 1287∼1340), 백문보(白文寶, 1303∼1374), 정몽주(鄭夢周, 1337∼1397) 같은 유학자가 대표적인 비판론자였다. 이들 유학자의 불교 비판을 집대성하고, 철학적인 기초 위에서 본격적으로 불교 교리를 비판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이었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의 저술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우위를 선양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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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초상
정몽주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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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우리 사회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잘 조화를 이루며 병존하였고, 각기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유교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교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사회적 이념이었지만, 불교도 왕실이나 일반 민중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의 병존은 민족의 정신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사회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데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화가 급격히 진행되었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조선 후기 이후 사회 전반에 보급된 유교 문화는 우리 민족의 의식과 가치관의 중심을 유교에 두게 하였고, 예속(禮俗)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습속(習俗)을 유교화하였다. 일반 민중 사회에서는 불교의 영향력이 지속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 후기 사회는 거의 유교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배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층은 완전히 유교화하였다. 이는 유교의 본 고장인 중국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사회 현상이었다.

하나의 사회가 유교화되었다는 것은 곧 사회 전반의 예속이 유교화된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의 개창 직후부터 유교와 유교 예속을 보급하기 위한 국가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불교적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유교 예속을 보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16세기 이후부터는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가 확연히 자리를 잡아 나갔고, 사회 습속도 점차 유교화하였다. 이는 국가적인 정책과 함께 많은 유학자의 적극적인 노력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16세기 이후에는 훌륭한 유학자가 많이 나와 성리학 연구를 심화시키고, 교육을 통해 사회 저변에 유교 사상과 예속을 보급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학문과 수양을 실천하였지만, 동시에 조선 사회를 유교적으로 교화(敎化)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들의 성리학적 연구도 큰 업적을 남겼지만, 더욱 의미가 컸던 것은 교육 활동을 통하여 유교적 사회 규범을 확립하고 보급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을 유교 사회로 만든 핵심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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