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
  • 관료들의 불교 신앙
이영춘

조선 초기 사대부 관료들은 유교의 진흥과 불교 억압을 주장하며 왕실의 불사에 극렬히 반대하기는 하였지만, 자신들 역시 불교를 믿고 불사를 벌이는 일이 잦았다. 관료로서의 처신과 신앙인으로서의 태도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대부들의 불사는 매우 일반적이었다. 이색(李穡, 1328∼1396)은 당대의 거유(巨儒)였지만 불교를 숭신하였고, 변계량(卞季良, 1369∼1430)처럼 대부분의 사대부가에서는 암암리에 불사를 행하고 있었다. 또 상례나 제례 같은 가정의례에서 불교 의례를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사대부들은 조상의 묘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齋舍)나 분암(墳庵)을 지어 유지하였고, 돌아간 조상을 위해 염불 송경(念佛誦經)하는 풍습도 오래 지속되었다. 유교적 통치 이념과 사회 질서가 어느 정도 확립된 세종 치세 후반에도 사대부들의 불사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신하들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집에서는 부처와 신을 섬김에 성심을 다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도리어 신불(神佛)을 그릇되다고 하니 내가 이를 심히 미워한다. …… 너희들은 불경을 만드는 것을 그릇되다고 하지만 부모를 위하여 불사를 벌이지 않은 자가 있는가.150)『세종실록』 권111, 세종 28년 3월 26일(계사).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공양왕 때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초빙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였으나, 평소에는 불교를 숭배하였다. 그는 “불교는 청정(淸淨)과 적멸(寂滅)을 으뜸으로 삼아 국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도, 정부 각 부서의 자복사(資福寺)를 전국의 명찰에 지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51)『태종실록』 권14, 태종 7년 12월 2일(신사).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신색(申穡)은 당시의 불교적 폐습을 맹렬히 비판하였지만, 내불당의 『법화경』 사경에는 참여하기도 하였다.152)『세종실록』 권28, 세종 7년 6월 23일(신유).

당시에는 아직 성리학적 이념이 고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은 종교로서의 불교 신앙과 의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는 사대부 사회에서 새 왕조의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장려된 유교 의례와 갈등을 빚었다. 국가의 정책이 그러하였다고 하더라도 사대부 자신들은 아직도 불교적 인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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