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4권 유교적 사유와 삶의 변천
  • 제4장 예절로 다스리는 사회의 종법 질서
  • 1.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 조선 초기의 불교 의례
  • 법제화된 불교 의례, 수륙재
이영춘

고려시대 이래 국가의 불교 의례는 각종 자연 재난을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주로 시행되었다. 이것은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기원전 104)의 천견설(天譴說)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가 덕을 잃고 정사(政事)를 잘하지 못하면 각종 재이(災異)를 보여 군주를 견책(譴責)한다는 것이었다. 재이는 일식·월식·유성·한발·홍수·전염병 등으로 나타난다. 태종 초반까지는 이러한 재이가 있을 때 문수회(文殊會)·소재 도량(消災道場)·수륙재(水陸齋) 등을 설행하였다. 그러나 1405년(태종 5) 이후에는 이러한 불교적 의례를 잘 시행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교 사상이 널리 보급되면서 재이에 대한 인식과 처방이 변하였기 때문이다. 곧 ‘하늘의 견책’은 불교적 기양(祈禳)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주의 ‘수양과 조심(修省)’을 통하여 예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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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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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초기에는 강력한 억불 정책을 펼쳤으므로 거의 불교 의례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염병이 돌아 인심이 흉흉할 때는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불교식 기우제도 자주 지냈다. 당시 사람들의 신앙이나 풍습으로 보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의례가 필요하였고, 유교적 제사로는 대신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유교 의례를 확립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제의가 여전히 시행되자, 당시의 통치자들은 기존의 불교식 상제(喪祭)를 간소화한 수륙재를 국상에 도입하였다. 수륙재가 칠칠재(七七齋)와 기신재(忌晨齋)를 대신하여 세종대에 『육전등록(六典謄錄)』에 수록되어 국가의 공식 상제로 법제화되었다. 이는 사대부와 서민들의 상제에도 도입되어 복합적 기능을 가진 불교 의례로 발전하였다.

수륙재는 원래 물이나 뭍에 있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에게 공양을 베푸는 불교 의식이다. 이는 또한 사자(死者)의 명복(冥福)을 비는 추천재(追薦齋)로서 극락왕생(極樂往生)하지 못한 모든 망자에게 명복을 비는 공동 추천재이기도 하였다. 수륙재는 고려시대에는 별로 행하지 않던 것인데, 조선 초기에 국가의 공식 의례로 흥행하였다가 중종 때 폐지되었다. 이는 억불 정책이 강화되고 유교 의례가 보급되어 가던 시기에 나타난 특이한 불교 행사였으며, 한때 국가 의례로 편입된 유일한 불교 의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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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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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는 당시 국가의 공식 의례였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서인들의 상제로서도 법제화되었기 때문에 『주자가례』의 가묘제(家廟制)와 함께 시행되었다. 1432년(세종 14) 집현전 부제학 설순(偰循)의 언급을 보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 나라에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상제는 수륙재만을 설행하게 하고, 그 나머지 예절의 조목은 하나같이 『주자가례』에 의거하게 하였습니 다. 아마도 장차 점점 제거하여 반드시 그 뿌리까지를 뽑아 버리고자 함인 줄 압니다. 사대부들은 위로 성상의 의도하심을 본받아 상제에 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가 이미 열에 서너 명은 됩니다.153)『세종실록』 권55, 세종 14년 3월 5일(갑자).

이것은 불교 의례에서 유교 의례로 전환되어 가던 당시의 사회 현상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 이래 뿌리 깊게 보급되어 있던 불교 의례와 풍습을 하루아침에 유교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도기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가묘제는 태조 때 시행령이 내려졌지만 실제로 잘 준행되지 않아 성종 때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었다. 신하들은 끊임없이 수륙재의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바로 다른 불사를 조장하고 가묘제의 시행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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